요한일서 3장에서 4장까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말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백 번 천 번 맞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형제'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 : 50]
이것이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형제'의 정의이다. 요한은 요한일서를 통해 요한 공동체에 속한 '형제'로 분류되는 이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쓴 것이다. 절대로 요한 공동체를 공격하는 거짓 사도들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철저하게 경계하라고 선포하고 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한일서 3 : 7]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속한 이들이 성경에 근거한 '형제'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있는지를 점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후에 다음과 같이 목숨 다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 : 16~18]
이 요한일서 3장 16~18절의 말씀의 범위를 각자가 속한 교회의 공동체에서 조금 더 확대시켜 보자. 한반도의 휴전선 이북에는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하교회 성도분들이 계시다. 한국교회는 과연 이 분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을까? 즉, 이 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히 여기고 있을까?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일까? 거짓에 속아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헛된 행함을 하며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 보다도 더한 짓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번에는 이 말씀의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혀보자. 이를 위해서 최근 튀르키예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연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친미를 하며 중도파 이슬람 국가였던 터키가 다시 정통 이슬람 국가로 탈바꿈하며 국가의 이름도 튀르키예로 바뀌었다. 이 튀르키예 대통령 에르도안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하는 것에 대하여 '초승달과 십자가의 전쟁'을 운운하며 엄청난 비판을 했다. 이와 동시에 아르차흐 지역의 기독교인 봉쇄 상황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이슬람)국가는 아직 살아있음을 강력히 선포했다. 이는 마치 가자지구의 하마스를 자신들의 '형제'로 인식하고 이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행함으로 도와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아르차흐 지역의 기독교인 봉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와 무슬림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 붕괴 후 1991년 독립했고,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같은 해 이 지역에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들은 2017년에 국가명을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바꿨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지난해 12월에 무슬림계 아제르바이잔 군인들이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인 ‘라친 통로’를 봉쇄했다. 명목은 '환경 활동가'였다. 이 지역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인데, 모든 공급망이 이 봉쇄로 인해 끊겼고,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아사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올해 9/19에 무슬림계 아제르바이잔은 군사작전을 펼쳤고, 9/28에 기독교계 아르차흐 공화국 해체 합의에 서명을 받아내어, 2024년 1월 1일부터 이 지역은 무슬림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 흡수통합된다.
공교롭게 아르메니아 지역은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던 아라랏산이 있는 지역으로 가장 오래된 기독교국가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유물이 많이 발굴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기독교의 역사적인 지역이 무슬림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에 대해 유럽연합은 실효성 없는 비판만 하고, 실제로는 원유 공급을 위해 아제르바이잔과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튀르키예는 아제르바이잔에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을 했다.
전 세계는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당하고 있는 박해는 생중계에 가까운 보도를 하면서 북한 기독교인, 아르차흐 지역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서는 침묵 중인 것이다. 아니, 서로 사랑해야 하는 기독교인들끼리도 서로에게 무관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초승달과 십자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데, 1000만 십자가 군사들이 포진한 한국교회는 죽어나가는 형제들에게는 관심도 없고 그저 자신들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밝히기 바쁘다.
그렇다면 이렇게 1000만 십자가 군사들이 속한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떨까? 정치적으로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인물가뭄을 겪고 있던 보수를 외치는 여당은 한 명의 영웅을 비대위원장에 앉혔다. 이 영웅은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외국인 이민 정책을 브리핑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가 수준이 있는데..."
외국인력정책에서 국익이 우선이지만 국제적 기준은 따라가야 하기에 특정종교 출신을 배제하는 정책은 추진할 수 없다며 한 말이다. 즉, 1000만 십자가 군사가 있는 작은 섬과 같은 이 땅에 초승달 군사들이 물밀듯이 유입되기 직전인 상황인 것이다.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외국인들에게 지방선거의 투표권을 주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치며 외국인 이민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를 설치하려고 했었다. 이를 현재의 보수의 영웅이 이어받아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 십자가의 군사들이여.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기독교의 가장 역사가 깊은 지역을 삼켜버린 초승달의 전사들이 이 땅으로 유입되기 직전이다. 그것도 보수의 영웅에 의해서 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아니,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이다.
내년 4/10에 치러지는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진보가 승리하면 차별금지법과 한반도 종전선언을 시도할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의 전사들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수라고 우기는 이들이 승리하면 초승달의 전사들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한일서 3 : 13]
우리 눈앞에 거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고 하나님 원망하지 말자. 세상은 원래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있다.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말씀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한일서 4 : 17]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그 '시발점'이다. 흔히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 타락인 동성애,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을 고된 노동으로 괴롭힌 애굽을 이 역사들의 시발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공통점은 없어 보인다. 다음의 2가지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창세기 18 : 20]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애굽기 2 : 23]
이 2가지 말씀에 공통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찾았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짖음'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 타락한 곳에서의 부르짖음을, 애굽에서 고된 노동으로 괴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 이 역사들의 시발점이다.
앞으로 펼쳐질 대한민국의 상황을 바라보면 탄식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탄식에서 끝나면 안 된다. 탄식이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감옥에서의 부르짖음을 보라.
"Save my soul. Save my country"
단순히 '나'만 구해달라고 부르짖은 것이 아닌, '국가'차원에서 구해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의 기도이다. 우리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나라를 위해 강력하게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역대하 7 : 14]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강력하게 부르짖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나 하나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되는가? 공교롭게 요한계시록에 성도의 기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정확하게 선포되어 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 : 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요한계시록 8 : 3~5]
성도의 기도가 향으로서 하나님 보좌 앞 금 제단에서 드려지고, 그 향의 연기가 채워져 있는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아낸다. 이것이 천사의 일곱 번째 인이 떼어질 때의 모습이다. 내 눈앞에서는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억하신다. 그리고 그 부르짖은 대로 제단의 불을 담아서 이 땅에 쏟아내는 심판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강력하게 부르짖는 십자가의 군사들이 되기를, 그리고 이런 십자가 군사들을 길러내는 훌륭한 교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P.S
이런 비참한 상황이 되지 않기를...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준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르렀음이라
[에스겔 7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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