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삭개오의 결단은 참으로 놀랍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누가복음 19 : 8]
우선, 자신의 소유의 절반에 해당하는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흡사,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 : 44~45]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꾀나 큰 결단이 필요한데, 자신이 지금까지 쌓은 재산의 절반을 하루아침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삭개오는 세리장이다. 돈 계산 하나는 그 누구보다도 으뜸이었을 것이다. 이런 삭개오가 왜 절반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을까? 남은 절반으로 평생 놀고먹으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가 자신의 재산의 절반정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에는 삭개오가 나무에서 단숨에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했던 모습과 너무 대조 된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바로 그 다음구절에 이어진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에 대해서는 4배로 갚겠다고 한다. 로마시대 당시 세리들은 뒷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결단을 했으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성실하게 행하지 않은 모습이 양심에 걸렸던 것이다. 이에,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그 죄값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4배로 갚아나가겠다는 말에 삭개오의 이런 마음이 담겨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위기 6 : 2~5]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출애굽기 22 : 4]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집에서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출애굽기 22 : 7]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둑질 했을 때에는 그 본래 물건의 1/5 을 더해서 갚으라고 하셨다. 즉, 1.2배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에서는 살아있는 것을 도둑질 했다면 2배, 돈이나 물건을 이웃집에 맡겼는데 그 이웃이 도둑맞고 그 도둑이 잡히면 2배로 배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 기준으로보면, 기껏해야 2배로 갚아도 충분하다.
하지만, 삭개오는 4배로 갚아나가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값을 율법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마음에 입각해서 치르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머지 절반의 재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이 잘못한 사람들에게 죄 값을 치르는데 사용하겠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감정에 치우쳐 무작정 자신의 전부를 다 나눠주겠다고 하고, 뒤늦게 "이러지 말 걸..." 이라는 후회하는 것이 아닌, 세리장이니 만큼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를 것 까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결단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재물' 에게 끌려온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것도 과거의 삶은 없던것으로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죄 값을 치르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이다. 이것이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 죄 값으로 치를 수 있었던 이유이다.
간혹, 삭개오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부자청년에게는 재산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것을 요구하셨고, 삭개오에게는 절반만 나눠줘도 기뻐하셨다며 각각 사람에게 다른 기준을 갖고 계신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 삭개오도 자신의 전재산을 다 하나님 앞에 드리고 예수님을 쫓겠다는 결단을 한 것임을 놓치지 말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공평하고 의로운 기준을 갖고계신 분이다.
이런 삭개오의 결단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 : 9~10]
삭개오의 집에 삭개오로 인해 구원이 이르렀는데, 그 구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이는 유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에 접붙임바 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도 결국, 이 언약에서 떨어져 나갔던, 잃어버렸던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신다. 이 말씀을 들은 삭개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구원받은 자로써, 지금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나가겠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겠다!" 라는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
삭개오와 부자청년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두 사람이 바라보는 것이 미묘하게 달랐다. 부자청년은 '영생' 을 바라봤고, 삭개오는 '예수님' 을 바라봤다. 얼핏 보면 비슷한 것을 보고있는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천국과 지옥 차이이다. 영생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 : 3]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 : 21]
영생은 유일하진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영생에 이르는 통로를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부자청년은 '영생' 만 바라보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영생의 통로되시는 예수님을 놓친것이다.
반면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바라봤고, 그 결과 '구원' 에 이르게 되었다. 영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삶의 결단을 통해 구원을 얻은 것이다. 영생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청년과 삭개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삶 가운데 어떤것을 주인삼을 것인가에 대한 결단이다. 부자청년은 결국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다. 반면에, 삭개오는 스스로 자신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했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산상수훈의 두 주인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이로인해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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