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찾고 있나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출애굽기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이끄셨던 방법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힘들 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우리를 이끄심을 잊지 말자는 희망찬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애굽기 13 : 21]
출애굽기 말씀에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다고 명확히 나와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이스라엘 민족은 평생 광야생활만 했을까? 하나님께서 굳이 남의 영토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끄집어내어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이용하여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출애굽을 시키셨다. 광야에서 평생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아닌, 약속의 땅에 정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출애굽을 시키신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에 정착을 한 민족에게는 광야에서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과의 술래잡기는 필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힘들 때에도 하나님은 항상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희망찬 메시지는 우리의 삶이 광야와 같은 상황일 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되어버린다. 과연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름 기동과 불 기둥과 같은 하나님의 이끄심이 필요 없었을까?
이스라엘 민족처럼 끊임없이 고난과 전쟁을 겪은 민족도 드물다. 즉, 하나심의 이끄심과 보호하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유목민과 같은 삶이 아닌, 어느 정도 삶의 자리를 잡은 성도들에게도 굶주린 사자와 같은 마귀가 달려들기 마련이다. 오히려 움직이지 않으니 더 표적이 되기 쉬울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이끄심의 상징이었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어떤 형태로 이스라엘 민족의 삶에 녹아들어 갔는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구름 기둥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회막 다시 말해 성막의 설계도를 상세하게 알려주신다.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성막을 만들었다. 제사장 및 성막과 관련된 내용인 출애굽기 39장과 40장에만 '명령하신 대로'라는 구절이 18번 반복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창조된 선악과 사건 이전의 세상과도 같은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죄악으로 뒤덮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정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정결하고 거룩한 장소가 성막인 것이다. 즉, 오늘날의 교역자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세워져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성막이 갑자기 '구름'으로 뒤덮였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애굽기 40 : 34~35]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구름 기둥이 회막을 뒤덮어버렸다. 이와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안개가 심한 곳을 운전해 본 경험이 있는가? 1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도로를 운전하게 되면 '공포심'이 온몸을 짓누르게 된다. 항상 이스라엘 민족보다 앞서가면서 이들을 이끌었던 구름 기둥이 회막을 뒤덮은 상황이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오죽했으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았던 모세조차 이 구름으로 인해 회막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가운데 하나심께서 모세를 불러주신다. 마치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너 이 자식!"이 아닌 "아담아"라고 이름을 불러주셨던 것과 같이 말이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 1 : 1]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법을 알려주신다. 즉,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이것이 예배의 첫 단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불 기둥은 어떻게 되었을까?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 : 38]
불 기둥은 밤에 성막 위에 있는 구름 가운데 있었고, 온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그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던 불이 이스라엘 민족의 첫 제사 때 다시 등장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위기 9 : 24]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 위임식 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마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 그 제단에 있는 번제물과 기름을 불사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법을 설명하실 때 제단의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흠향하신 첫제사의 제물을 불살랐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이 불을 제단에서 꺼뜨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성막을 뒤덮고 제단의 불로 임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서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진영 한가운데 있는 성막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배'를 통해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출애굽기는 창세기 다음에 있기에 성경 1독을 목표로 읽어나가는 이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는 성경이다. 그리고 '출애굽'이라는 워낙 스펙타클한 내용이 담겨있기에 뇌리에 박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네 삶이 조금이라도 힘들면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과 비교하며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찾아 나선다. 이는 마치 자신의 삶이 풀리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버리는 격이다.
성경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좋은 자세이다. 하지만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힘들고 풀리지 않을 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찾기 이전에 '예배'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교회가 되고, 하나님 명령대로 준행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이것이 광야와도 같은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구약시대 당시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몸소 화목제물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건이다. 이 둘로 갈라진 휘장을 히브리서에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 : 20]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한다. 예수님의 육체가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나뉘었고, 우리는 그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둘로 나뉜 예수님의 육체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이런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있지 않은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15 : 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고기를 쪼개어 그 사이를 횃불로서 지나가셨다. 이때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못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현장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 둘로 갈라져있고, 그 건너편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 사이를 건너갈지 말지를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 행위는 언약 다시 말해 약속을 하는 옛 형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약속을 하면서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을 하셨기에 이를 짧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율법을 2가지로 압축시켜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를 지키겠노라 결단하며 둘로 나뉜 예수님의 육체 사이를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예배자'인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어주셨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의 길을 세팅해 주시고 그 길을 건너올 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아들의 육체를 둘로 가르면서까지 말이다.
다만 이 언약의 길을 가볍게 생각하지는 말자. 이 언약의 형태가 의미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둘로 쪼개진 고기와 같이 둘로 쪼개지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이다. '예배자'로 살겠다는 결단을 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실제로 '예배자'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회개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향이 틀어졌을 때에 다시 방향을 돌이킬 수 있다. 하지만 회개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RESET 버튼으로 여기고 '예배자'라고 하면서 죄악의 길로 전력질주를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여름에 모기를 잡았을 때 터져 나온 핏자국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셨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보혈을 헛된 피로 만들지 말고 언약의 길을 건너갈 예배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