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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분단 vs 대한민국의 분단 - 2

Gospel Barista 2021. 8. 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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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이후의 상황은 어땠을까?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유다 땅에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곧 베들레헴과 에담과 드고아와
벧술과 소고와 아둘람과
가드와 마레사와 십과
아도라임과 라기스와 아세가와
소라와 아얄론과 헤브론이니
다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들이라
르호보암이 그 방비하는 성읍들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지휘관들을 그 가운데에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모든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매우 강하게 하니라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역대하 11 : 5~12]


르호보암은 작정하고 남유다를 발전시킨다. 주요 도시들에 성읍을 건축하여 견고하게 하였고, 지휘관들을 그 가운데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방패와 창을 두어 매우 강하게 하였다.

6.25 전쟁 휴전 이후의 남한의 상황은 어땠을까? 이승만 대통령이 일궈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군사분야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경제적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남한이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우수한 인재를 교육하고 사회 여러분야에 고루 등용하여 나라를 발전시켰다. 공교롭게 이 두 나라의 양상이 동일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어떻게 나라를 이끌고 있었을까?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역대하 11 : 13~16]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레위사람들을 제사장 직분에서 해임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우상숭배를 하기 위한 제사장들을 세웠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 떠나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다. 이들은 그들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레위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이들은 단 한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이다.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이다.

6.25 전쟁에서의 대한민국의 상황을 살펴보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남한은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계속해서 북진을 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하여 한반도를 거의 탈환하기 직전이었다. 그 때 북한의 지원요청을 받은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UN군과 남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4 후퇴의 시작이다. 이 후퇴 작전 중 흥남에서 후퇴한
흥남철수작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1950년 12월8일,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던 미국과 국군의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실제로 12월15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철수작전이 펼쳐졌다. 장진호 전투에서 적 12만명을 저지하고 17일 만에 탈출한 미국 해병 1만여명을 비롯해 군인만 10만5000여명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군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 약 10만명(9만8천명)의 피난민도 함께 흥남부두로 향했다.

우리는 흔히 '철수작전' 이라고 하면, 군인들만 철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군 병력은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종 다양한 무기와 장비들, 장갑차와 군용차량들 등 모든것이 군 병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군수물자들이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어마어마한 병력손실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흥남철수작전은 미군과 국군의 군인 외에도 다양한 무기와 장비들까지 철수시키는 어마어마한 철수 작전이었다. 이런 사안을 고려하여 한반도의 남쪽과 일본에서 193척의 선박이 동원됐다.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전의 총 책임자는 미군 제10군 사령관인 Edward Almond 장군이었다. 미군의 지휘부는 병력과 군수물자만 수송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고, 피난민 속에 스파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로 민간인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미군 제10군 사령관인 Edward Almond 장군을 설득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Edward Almond 장군의 고문(통역)이었던 현봉학 박사이다. 김백일 장군은 "피난민을 태우지 않으면 저들과 함께 육로로 내려가겠다!" 라고 했으며, 현봉학 박사는 "저들을 살려달라!" 라고 간청했다.

김백일 장군은 일제시대 일본 육사출신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어있다. 하지만, 김백일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과연 이 사람이 나라를 배신한 친일파인지 의심이 간다. 원래 본명은 김찬규인데, 일제가 패망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온 나라가 붉게 물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홀로 반공에 입각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 는 뜻으로 김백일로 개명하였다. 국군에 다시 임관하여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 사령관으로써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장을 맡았다. 1950년 9월에 국군과 UN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이 국군 1군단이 10월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해서 북상하였다. 이것이 10월1일이 국군의 날로 제정되는 계기였다. 흥남철수작전 때에는 북한의 공산당 치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피난민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미군 알몬드 사령관을 끝까지 설득해서 피난민들을 구출한 공을 세웠다. 1951년 3월28일에 제8군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군단본부로 급거 귀대하기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런자가 나라를 배신한 친일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군 출신이면 무조건 친일파인가? 제주 4.3 사태 주도자 김달삼도 일본 교토의 성봉중학교, 도쿄의 중앙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나왔으며, 일본 육사 출신이며, 제주 4.3 사태 진압당한 이후 월북하였다. 그 이후 6.25 때 북한의 특수부대를 이끌고 남침하였다. 이런 자는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현봉학 박사님은 어떤 분일까?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당시 함경도의 명문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한마디로 독실한 기독교인 의사였다. 미국에서 유학 후 1950년 3월에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0년 10월 중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과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와의 통역 문관으로 있다가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우트 됐다. 이런 현봉학 박사님이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끝까지 설득해서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민들을 구출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애국심으로 이 피난민들을 데려가야한다고 했던 것일까?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숨겨져있다. 흥남철수작전의 피난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던 현봉학 박사님은 공산 치하에서 기독교인을 비롯한 주민들이 박해 받을 것을 떠올렸다. "저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가면 중공군에게 몰살당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을 태워주세요!" 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이것이 피난민들을 그토록 애절하게 배에 태워달라고 요청했던 배경이다. 현 박사는 자서전에서 “나는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고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하겠다 결심했다”고 기록했으며, 그는 결심한 대로 행동했다.

피난민들은 얼마나 급박하게 배에 몸을 실었을까? 정원이 60명이었던 화물선 메러디스빅토리호는 피난민 14,000 여명을 태우고 흥남에서 거제도로 철수했다. 이는 2004년에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더욱이 이 배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미군은 이들을 김치 1호~5호로 불렀다. 즉, 출산 직전의 만삭의 임산부도 '자유와 신앙' 을 위해 마음을 굳게먹고 대한민국으로 목숨걸고 넘어온 것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단순한 자유가 아닌,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이들 임산부 5명만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는 10만 피난민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들 피난민을 태우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들은 흥남부두에 버려졌으며, 이들이 북한과 중공군의 손에 들어가면 큰 손해이므로, 흥남부두에서 모두 폭파시켰다. 즉, 피난민들은 엄청난 불길을 뒤로한채 철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핍박을 피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남유다로 넘어온 마음을 굳게한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불길을 뒤로 한 채 철수한 흥남철수작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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