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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여전히 에덴동산에 사는 기독교인들

Gospel Barista 2021. 8. 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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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로 부터 시작이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대가 바로 '에덴동산' 이다. 이 곳은 '죄' 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지낸 장소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평가되는 곳이다. 우리에게 '에덴동산' 을 상상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한결같이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뜨면 새들이 지저귀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흐르며, 녹색으로 뒤덮인 잔디밭 동산에 다양한 과일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있을 것만 같은 장면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아름다운 관계에 금이 가버렸고, '죄' 가 이 세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을 갈아야 하고, 하와에게는 임신의 고통이 더해졌다.

더 나아가, 노아시대에 죄악들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 에덴동산은 이 시기에 다른 곳과 동일하게 물에 잠겼을 것이다. 지진이 발생하여 쓰나미가 휩쓸고 간 곳을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비규환', '아수라장' 이런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무대이다. 성경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세기 3 : 18]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서 2 : 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 : 8]


우리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마귀가 공중 권세늘 잡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 : 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모든 것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는 듯 하다. 악한 것들을 분별하자고 외치면, '음모론' 취급하며 사회 부적응자로 취급한다. 더 나아가 기술의 발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그 기술을 마음껏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벨탑을 쌓아올릴 때, 당시 사람들이 채택한 기술은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한 것이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세기 11 : 3]


이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한다는 것은 벽돌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물을 막기위한 밀봉기술이다. 이 기술은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알려주신 기술이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세기 6 : 14]


그렇다면 바벨탑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기술을 채택했으니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보시고 칭찬하시며 바벨탑 건축에 참여한 자들에게 하늘나라 상급을 약속하셨는가? 정반대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대노하시며 사람들을 흩으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이로인해 우리가 영어를 배우고 제 2 외국어까지 배워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이거나, 상상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짓없고 가감없는 역사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다. 역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자.

현재 전 세계는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하는 기술을 마주하고 있다. 심지어 이 기술을 인류를 구할 것 같은 구세주로 여기며 앞다투며 그 기술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 기술이 낙태된 태아의 세포를 이용하고, 인간의 정상적인 세포에 바이러스의 일부인 스파이크 단백질을 돋아나게 해도 아무 거리낌 없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

꼭 스테이크 처럼 나이프로 썰어서 입으로 먹어야 인육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낙태된 태아의 세포를 투명한 액체로 만들어 바이알(약병)에 담아 우아하게 주사바늘로 우리 근육에 주입해주는 것은 인육을 섭취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어린 아이의 생명을 희생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자녀를 이방신에게 불태워서 바치는
몰렉제사와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이런 우리 몸의 세포에 바이러스의 일부분이 돋아나는 것이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듯이 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의 세포부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상태가 아니게 된다. 순수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세포가 아닌 인위적인
이물질이 돋아난 세포가 되버리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리며 분별하자고 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기술이 나오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선용해야 한다!" 며 아름다운 얘기만 한다. 에덴동산에서 살고있는 착각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하다. 이런 논리라면, 마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해도 되고, 성적 욕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매매 업소도 가면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세상이 규제란 규제는 다 하고 있으니 어느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괜히 '목숨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먹고 입고 살아온 삶이 온전히 나 스스로 해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이를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 나를 먹이시고 입히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 편에 속해있으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 편에 서는 문제에 있어서 생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배경이 된 로마시대의 도미티안이 행했던 기독교인들을 향한 핍박과 박해를 공부해보라. 이 와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죽도록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믿음을 지키는 문제로 인해 직장을 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잔인하게 살해되기까지 했다. 이들은 바보라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음모론에 취해서 이런 불쌍한 선택을 했을까? 이들의 삶은 직장을 잃더라고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신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순교하는 스데반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는지를 상세하게 묵상해보라. 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일어서신 상태로 스데반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것이 순교하는 스데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태도이다. 괜히 죽도록 믿음을 지키며 충성한 이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관의 원어가 '스테파노스' 겠는가?

세상의 핍박이 두려운가? 아니면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것이 두려운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인들을 향한 핍박과 박해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가 임박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스데반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편에 선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결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관람하듯 보지 않으실 것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데반의 사건이 증거요, 약속인 셈이다.

입으로만 마라나타를 외칠 것인가? 아니면 마라나타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 아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알곡들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갈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라지를 추수할 때 까지 뽑지 않은실 것이라고 말이다.

곧 추수의 때가 온다. 지금까지 믿음생활 잘 하다가, 추수의 때 직전에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알곡으로써 끝까지 견뎌내자. 그리고
진정한 에덴동산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 : 1~4]


아름다운 에던동산을 꿈꾸며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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