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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사도행전

청년 유두고의 죽음과 부활

Gospel Barista 2022. 1. 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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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무교절 이후에 빌립보에서 배를타고 5일동안 이동하여 드로아에 도착했다. 바울이 다음 날 떠날 작정으로 밤 늦게까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때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사도행전 20 : 9]


창틀에 걸터앉은 청년 (※출처 : Pixabay)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높이의 창에 걸터앉아 바울의 이야기를 듣다가 졸아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이 때 바울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사도행전 20 : 10]


바울이 내려가서 유두고의 위에 엎드려 몸을 안고 생명이 유두고의 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 분명 사도행전 20 : 9 에서는 유두고가 죽었다고 했는데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이다. 즉, 의사이다. 사도행전 20 : 9 의 "죽었는지라" 는 의사 누가의 유두고를 향한 사망선고였다. 유드고의 육은 실제로 죽었던 것이다. 3층 창가에서 졸면서 떨어졌으니 머리부터 곤두박질 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살아있는 것이 더 이상할 노릇이다.

의사의 사망선고 (※출처 : Pixabay)


바울은 이 사망신고를 듣고 그의 시체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다. 이 시기의 바울은 어떤 자였는지를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행전 19 : 11~12]


바울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고, 바울의 소지품만으로도 병든 사람을 낫게하고 악한 귀신도 내어 쫓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바울이었기에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실제 눈으로 지켜본 이들은 유두고의 부활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도행전 20 : 12]


이쯤되면 바울은 그 동네에서 슈퍼스타가 되었을텐데, 바울의 행동은 굉장히 쿨하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도행전 20 : 11]


죽은자를 살리고 다시 올라가 자신이 하던 복음전파를 완료하고 홀연히 떠난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이 하셨기에, 자신은 그저 자신이 해야하는 사명을 묵묵히 감당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하나하나 상세히 짚어나가보자. 우선, 청년 유두고는 바울이 선포하고 있는 와중에 졸았다. 당시 상황을 보면, 무교절은 지났지만 떡을 떼려 모였다고 한다. 즉, 성찬예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성찬예배 (※출처 : Pixabay)


이 와중에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날 생각에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라도 더 복음을 전하고자 설교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사도행전 20 : 7]


더욱이, 시간은 밤이었으나, 예배당의 불빛은 엄청나게 많이 켜놓은 상태였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사도행전 20 : 8]


이와중에 청년 유두고는 졸고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열정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복음의 파도앞에서 깨어있지 않고 졸고있는자의 결말은 곧 죽음인 것을 유두고의 모습을 통해 드러내셨다. 수많은 설교를 들으며 "아멘" 으로 화답하기보다는 "드르렁" 거리는 코고는 소리로 더 많은 화답을 했던 나로써는 소름이 돋는 장면이다. 괜히 예수님께서 수많은 비유를 통해 "깨어있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복음 앞에서 졸고있던 청년 유두고는 죽었다. 이 유두고의 모습이 복음 앞에서의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를 죽은 상태로 내버려두셨을까? 실제 의사의 사망선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두고의 시체를 안고 그 안의 생명을 확인했다. 사망선고 이후에 사람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무교절이 지난 직후의 성찬 예배에서 청년이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이 예배의 분위기는 공포로 변하고, 성도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제일 거룩해야하는 예배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예배를 망치게 되면 제일 이득을 보는 이는 누구일까? 공중권세잡은 옛 뱀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바울은 드로아에서의 단 한 번의 설교의기회를 이대로 망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청년 유두고를 적극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리고 그 안의 생명을 느낀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즉, 죽은 유두고를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을 수 있었을까? 우선, 하나님께서는 죽은자를 다시 살리신 기적을 베푸신 적이 있으시다. 나사로도 살리셨고,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무교절이 지난 직후였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초실절의 시기와 거의 맞물렸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성찬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설교 직후에 성찬식이 거행되는데, 아직 설교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대로 성찬예배가 망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찬예배는 떡(무교병) 과 포도주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우리가 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성찬예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유두고를 살리실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다시 설교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바울의 믿음의 결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성찬예배가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도행전 20 : 12]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죽은 청년마저도 다시 살려내며 거룩한 성찬예배를 완성시키는 예배. 이것이 초대교회의 예배의 수준이다. 이 마지막 때의 상황과 드로아에서의 성찬예배의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밤이 깊어 세상은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져 있다. 이 가운데 교회가 해야하는 것은 예배당의 빛을 밝히 비추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 영적으로 잠들어있는 성도들을 깨워나가며 복음전파를 해야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렇게 복음전파에 목숨을 거는 모습은 세상사람들 기준에서는 바보처럼 보이고 세상의 관점으로 죽은자와같이 사망선고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적으로 영원히 잠들려고하는, 다시 말해 그 안에는 아직 생명이 꿈틀거리는 성도가 있다면 다시 살려내며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마치 바울이 유두고를 살려낸 것 처럼 말이다.

내가 먼저 유두고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먼저 점검하자. 그리고, 내 주변에 유두고와 같은 이들이 없는지 점검하자. 이미 떨어진 유두고와 같이 영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자가 있는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 이런 자도 살려내어 함께 영적으로 깨어있어, 함께 이 마지막 때를 넉넉히 승리하자.

교회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기를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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