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바울은 하나님께 로마에 가서 동일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 : 11]
이 사명을 받은 바울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바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양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증언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치자.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우선, 평양은 대도시 이다. 즉, 평양이라고 하는 지명 자체는 매우 넓은 범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서울만해도 25개의 '구' 로 구분되어있다. 각각의 구는 수많은 동으로 또 나뉘게 된다. 평양도 대동소이하다. '평양' 하면 수많은 동네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양으로 가라!' 라는 사명을 듣는 순간, '평양의 어디로 가야하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 다음은 선포의 대상이 누군지가 애매하다. 그저 평양이라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보이는 이들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수대 동상 앞에 서서 확성기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것인가?
심지어, 바울은 유대인들의 살해위협까지 받고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어떻게 안전하게 로마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되면 하나님께서 참 애매모호하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 된다. 이런 생각방식이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관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을까?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울을 이끄셨을까?
바울의 특징은 다음 말씀에 잘 나타나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And now, compelled by the Spirit,
I am going to Jerusalem,
not knowing what will happen to me there.
[사도행전 20 : 22]
바울은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이다. 이는 영어단어로 'Compel' 이다. 이는 '강제하다. ~하게 만들다' 이다. 즉, 성령님께서 바울을 강제로 하나님의 사명대로 살아가도록 이끌고 계시고, 바울은 이 이끄심에 순종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바울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후에 "로마의 어느동네로 가야하나요?", "로마의 누구한테 얘기해야하나요?", "저 지금 예루살렘 감옥에 있고, 감옥 밖의 유대인들은 저를 죽이려고하는데 어떻게 로마로 갑니까?" 등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선포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의 총독 베스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가이사에게 상소한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사도행전 25 : 11]
우선, '가이사' 는 로마의 황제이다. 그리고 '상소' 라는 단어는 법률용어로 '항소' 와 같은 뜻이다. 즉,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로마 황제 앞에서 증명해보이겠다는 다부진 선포를 한 것이다. 다행히 베스도 총독은 이를 무시하지 않고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 받도록 주선을 해주려고 한다.
베스도 입장에서는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넘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 황제에게 이 사건에 대한 기록들, 이 사건의 증거들, 쟁점이 무엇인지 등을 낱낱히 보고해야 했을 것이다. 회사에서 회장님 보고자료 하나 만드는 것도 몇일 밤을 세우며 매 보고단계마다 수정을 하며 보고서를 준비한다. 하지만 베스도는 기꺼이 이 일들을 감수하며 바울의 로마행을 도와주려고 한다. 이는 성령님의 이끄심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방법은 자연스럽게 바울을 살해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게 된다. 로마 황제가 재판을 해야하는데 피고인이 이송과정중에 피살됐다고 생각해보라. 로마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일이 될 것이다. 괜히 우리나라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벌들이나 검찰들이 살해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으로 교도소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순종하며 나아간다. 이는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스토리이다. 이를 바울 스스로 머리속에서 계획을 세웠겠는가? 바울은 성령에 매여 살아가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바울의 이 방법은 성령님께서 강권하여 계획하시고 이끄신 것이다. 사실 이 상황은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해주신 상황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 : 11~12]
이 말씀의 관점으로 보면, 바울이 한 일은 그저 성령에 매여 순종한 것 외에는 없다. 다만, 성령님의 계획과 이끄심이 그저 드라마틱하고 영화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방법이기에 그저 감탄 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뿐만 아니라, 각자 우리들에게도 기가막힌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이미 이 사명을 감당하기위한 드라마틱하고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계획들이 준비하고 계시다. 우리는 그저 바울과 같이 성령에 매여 한 걸음 한 걸음 전진만 하면 영화속의 주인공과 같은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이끄심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아그립바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만 않았어도 2년간의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사도행전 26 : 32]
바울이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면 유대인 암살단의 제 1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안타깝고 고집스럽고 꼰대같이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성령님의 계획하심임을 잊지 말자.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날의 대한민국에서의 쟁점은 백신패스이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백신 맞고 백신패스로 올가매는 감옥으로부터 석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바울과 같이 성령에 매여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해야하는 자들이다. 그저 백신패스의 감옥에서 석방될 생각하지 말고 바울과 같이 그저 성령에 매여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대로 선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나아가자. 이것이 가장 안전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참고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는 자들은 감옥 밖에서는 암살단 표적 1순위인 것을 잊지말자. 마치 바울이 그랬던 것 같이 말이다. 내 힘으로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끝낸다면, 내가 가야할 길에 매복해있는 암살단을 내 힘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객기 부리지 말고 성령에 매어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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