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서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하지만 성경은 창세기 33~34장까지도 계속해서 야곱을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으로 명기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야곱의 삶은 아직 이스라엘의 삶이 아닌 것이다.
우선, 에서에게 나아가는 진영의 배치를 살펴보자. 물론 야곱이 제일 선두에 섰지만, 두 여종과 그의 자녀들이 제일 앞쪽에 있었고, 그 뒤에 레아와 그의 자녀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이 자리를 잡았다. 400명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를 생각했을 때, 여차하면 자신이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한 배치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야곱의 진영은 기껏해야 12명의 자녀들과 4명의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17명. 거기에 사자들 몇명 더 있었을 것이다. 400명을 거느리고오는 에서의 무리가 달려들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가? 오히려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자기 자신에 제일 가까이 배치해서 자신이 지켜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잘 도망가기를 바라는 야곱의 헛된 바램과 꼼수가 반영된 배치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 처럼 말이다.
이런 야곱이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에서에게 향한다. 자신을 에서보다 낮추고 에서를 높임으로 에서의 마음을 풀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진 상태였으니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에서에게 나가면서 일곱 번 절을 했으니 얼마나 가여워보였겠는가?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의 '주' 라고 부르며 뇌물과도 같은 가축 떼를 예물이라며 강매하듯 떠넘긴다.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가족들 앞에서 자신에게 있는 장자권과 자신이 받은 이삭의 축복을 잊은 것이다.
그러면서 야곱이 말하기를 자식들은 연약하고 가축들의 새끼도 약해서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다 죽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에서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천천히 가겠다고 한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창세기 33 : 13~14]
실제로 자녀들은 낙타와 같은 가축들을 타고 이동했을 것이고, 야곱의 가축은 라반의 가축들 중 강한 개체들에게서 태어난 종자이다. 즉, 야곱의 주장은 그럴싸한 핑계거리인 것이다. 그저 에서와 동행하다가 갑자기 에서가 마음을 바꾸어 자신들을 죽이려고할 수도 있으니 적정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야곱은 에서가 세일로 돌아갔을 때, 숙곳이라는 곳에 장막이 아닌 집과 가축을 위한 우릿간을 지었다. 잠시 숙곳에 머물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곳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창세기 33 : 16~17]
이런 야곱이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쳤고,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세겜은 그저 디나에게 푹 빠졌고, 디나와 결혼하겠다고 아버지 하몰에게 얘기를 한다. 하몰은 야곱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무기삼아 복수와 디나 구출작전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의 야곱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는데 자신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을 하고있어서 잠잠했다고 한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창세기 34 : 5]
마마보이나 파파보이는 들어봤어도 썬썬파더(?)는 처음본다. 딸이 성폭행을 당한 아빠가 아들들이 없다고 잠잠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그렇게 기다렸던 아들들이 할례를 무기삼아 복수극을 펼치자 오히려 야곱은 자신이 역으로 복수를 당할 것을 걱정하며 역정을 낸다. 야곱에게는 딸이 강간을 당하건 말건 자신의 목숨과 체면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세기 34 : 30]
이런 썬썬파더 야곱에게 아들들이 참다못해 디나가 당한 대우는 정당하냐며 소리친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창세기 34 : 31]
이것이 창세기 34장의 마무리이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야곱의 모습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받은 '야곱' 을 계속해서 '야곱' 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벧엘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서원을 상기시키셨고, 이로인해 야곱의 귀향길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1 : 13]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이 했던 서원을 생각하며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어야 했다. 그러기에 디나의 성폭행 사건이 있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이후에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 : 1]
실제로 야곱이 자신들의 우상을 버리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으니, 그 이후부터 '야곱' 의 호칭이 '이스라엘' 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세기 35 : 10]
흔히 우리는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인' 으로 불린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호칭을 받았어도 실제로 하나님께 '그리스도인' 으로 불리고 있는지는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 '야곱' 이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받고도 계속해서 '야곱' 으로 불리운 것 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야곱이 우상과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에 제단을 쌓고 나서야 '이스라엘' 로 불리운 것을 명심하자. 교회에서 예배는 드리지만, 자신의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리스도인' 의 명찰은 받았지만 '세상 사람' 으로 불리고 있는 창세기 33~34장의 야곱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야곱' 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과 같이, 여전히 '세상 사람' 으로 살고있는 '그리스도인' 이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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