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장과 30장에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2가지 신박한 방법이 명기되어 있다. 이 2가지 방법에 녹아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찾아내보자.
창세기 29장에서의 방법은 모든 양떼가 모이면 목자들이 우물 입구를 덮고있는 큰 돌을 옮겨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고, 다 먹으면 그 돌을 다시 덮는 것이다.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창세기 29 : 2~3]
어떻게보면 단순할 수 있지만, 굳이 우물의 입구를 큰 돌로 막아야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우선, 우물은 들에 있다고 한다. 사막의 들에서 우물을 덮는 큰 돌이 없었다면 우물의 물은 금방 말라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큰 돌로 막아야할까?
큰 돌로 막는 이유는 목자 이외의 다른 짐승이나 동물이 우물의 뚜껑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생각해보라. 사막 한가운데서 지내는 야생 동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이들이 항상 자신이 원할 때 마실 수 있는 물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 항상 그 근처에서 머무를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잡아먹을 수 있는 약한 동물이나 초식동물들이 물을 섭취하러 오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냥을 해서 자신의 배고품을 해결할 것이다. 즉, 목자에게 있어서 야생 짐승들의 시선을 피해 양떼에게 안전하게 물을 마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우물의 입구를 큰 돌로 덮어놓는 것이다. 물론, 목자들은 이 무거운 큰 돌을 매번 옮겼다 다시 원복시키는 수고를 해야한다.
마귀는 이 구절을 기가막히게 잘 활용하고 있는 듯 하다. 사막에서 양떼들에게 우물의 물은 생명과도 같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것 처럼 말이다. 마귀는 이런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의 입구에 큰 돌을 올려놓은 듯 하다. 양들이 스스로 돌을 옮길 수 없듯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양떼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펼쳐보지 못한다. 아니, 펼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종교개혁을 통해 목숨걸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책을 널리 보급시켰지만, 지금 이 시대의 크리스쳔들은 그저 성경책을 뒤덮고 있는 큰 돌 위에 앉아서 세상문화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을 운운하며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놓은 사람처럼 신실한 척을 한다. 어른들이 이러고 있으니, 다음세대인 우리 아이들은 당연히 더 심한 상태가 될 수 밖에는 없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양떼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할 수 있을까? 그 힌트가 바로 큰 돌을 옮기는 목자의 역할이다. 목자는 매번 힘들지만 우물을 덮고있는 큰 돌을 옮겨내야 한다. 이와 같이 힘들지만 매번 큰 돌을 옮겨내며 생명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양떼들에게 공급해줘야 한다. 여기서 목자의 역할을 목사나 전도사로 국한하지 말라.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교회학교 교사들 또한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마귀는 그저 더 크고 무거운 돌들을 마구마구 쌓아 올리고 있다. 주일에 중요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주일에 큰 스포츠 경기들이 열리게 하고, 학교와 학원 숙제들에 파묻히게 하여 성경책을 펼치는 것을 뒷전으로 만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진화론을 공교육에서 가르치며 창조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인식에서 지워지게 만든다. 피부색, 혈액형, MBTI 등 진화론에 기반한 유전학의 개념과 통계학을 접목시켜 인간의 특성을 분류한다. 이런 분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성령님께서 이런 인간의 특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 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즉,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넘어서 성령에 감동한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없는 삶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귀는 이런 무거운 돌들로 성경책을 짓누르고 있는데, 과연 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교회에서 MBTI 검사를 해주고 있다. MBTI 특성별로 읽어야하는 성경말씀과 불러야 하는 찬양을 분류해줄 것인가? MBTI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으라고 선포해야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목자의 위치에 있다면, 제일 처음 해야하는 것이 마귀가 쌓아올린 생명수 입구를 막고있는 큰 돌을 옮기는 것이다. 양떼들에게 생명수가 공급되기만 하면 죽지 않는다. 이를 명심하고 큰 돌들을 옮겨버리자.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역부족인가? 그렇다면 목자들끼리 합력하여 같이 옮겨내자. 라헬은 여자인데 양떼를 치는 목자였다. (For she was a sheperd)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While he was still talking with them,
Rachel came with her father’s sheep,
for she was a shepherd.
[창세기 29 : 9]
라헬도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할까? 마귀가 쌓아올리는 큰 돌들을 치워버리고 양떼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하는 목자가 되자.
그 다음으로 창세기 30장에서의 물을 마시게 하는 신박한 방법을 살펴보자.
창세기 30장에서는 양떼 뿐만 아니라 염소떼도 같이 등장한다. 야곱이 라반에게서 독립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시점에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정하라고 한다. 이는 라반이 야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기 위한 꼼수였을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양떼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 염소떼 중에서는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품삯으로 갖겠다고 한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창세기 30 : 32]
즉, 정상적인 양과 염소가 아닌 약간의 흠이 있는 개체를 자신이 가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신박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양떼와 염소떼를 늘려간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창세기 30 : 37~39]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물 구유에 세워놓으면, 양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는데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는 것이다. 야곱은 튼튼한 양이 새끼를 밸 때에 3가지 나무의 가지를 두어 튼튼한 새끼를 낳게하여 야곱의 재산이 날로날로 불어났다.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창세기 30 : 41~42]
이 말씀을 유전학으로 접근하여 우성과 열성 유전자의 이론을 뒤집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많이 있다. 물론 잘못된 접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핵심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는 마치 6.25 전쟁 당시 UN 군이 대한민국을 살린 것이라고만 주장하는 것과 같다. 6.25 전쟁 당시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철저하게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했다. 이 기도회 직후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즉,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살린 것은 UN군이 아닌, UN군을 움직이신 하나님이시다. 이런 관점으로 창세기 30장의 말씀을 살펴보자.
우선 3가지 나무가지가 등장한다. 야곱은 이 나무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냈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3개의 나무십자가가 세워졌었다. 그리고 그 3개에 달린 이들은 옷은 물론이고, 채찍질로 인해 온 몸의 피부까지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이를 바라본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5 : 39]
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세워놓은 3가지 나무의 가지를 바라본 양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 을 낳았다.
엥? 이는 백부장의 반응과는 사뭇 달라보인다. 십자가를 통해 거룩한 성도로 거듭나듯이 새하얀 양의 새끼가 태어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흠이 더 선명하게 부각된 느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 거듭남의 첫 걸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고백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누가복음 5 : 8]
즉, 3가지 나무를 통해 자신의 흠, 즉, 죄가 부각되도록 거듭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죄를 회개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십자가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거듭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하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못박히셨다. 이 은혜를 맛보았다면, 그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또 다른 포인트가 있다. 야곱은 튼튼한 양과 염소들에게만 3가지 나무가지를 보여줬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했을 때,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 있는 튼튼한 양에게 십자가를 올바로 바라보게 하신다. 그저 죄의식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할 약한 자들은 십자가를 통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4 : 16]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튼튼한 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을 보고 일곱 번까지는 넘어져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 : 24]
더 나아가 성경은 대놓고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하지 않겠는가? 강하고 담대하여 십자가를 올바르게 바라보고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 거듭남의 시작점에 서있는지를 점검하자. 이것이 창세기 30장에서 양떼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하는 야곱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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