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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확실한 선긋기

Gospel Barista 2024. 3.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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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 2장의 말씀을 읽다 보면 '우리(We)', 와 '너 또는 너희(You)'로 구분이 되는 느낌이 많이 든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과, 이 사실을 믿는 요한의 공동체를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요한의 공동체는 이러한 진리를 훼손하려는 도전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우리'와 '너희'를 확실하게 선을 긋고 피아식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확실한 선긋기'가 명확하게 나타나있는 말씀구절이 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일서 2 : 18~19]


확실한 선긋기


마지막 때에 나타난 '수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우리'를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철저하게 구분시키고 있다. 그들(적그리스도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지 않고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치기를 할 수 있어??"

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본적인 생각에 휩싸이지 말자. 이렇게 확실하게 선을 긋고 피아식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군인 '우리'를 끔찍할 정도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죄'의 문제는 전쟁을 치러야 이길 수 있는 개념이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모습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나이브한 마음가짐으로 이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서 피아식별은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이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파악해야 나와 함께 싸우는 동료인지, 아니면 나의 총구가 향해야 하는 대상인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와 '너희'를 철저하게 구분하며 피아식별이라는 확실한 선긋기를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피아식별


그렇다면 우리는 아군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아직 아군이 되지도 않은 적군을 사랑으로 보듬어주지 않는다고 아군을 향해 독설을 내뱉고 있지는 않는가? 역으로 적군을 아군으로 인식하고 적군의 원하는 대로 놀아나면서 실질적인 아군을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는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교역자 또는 교회학교 교사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담당하고 있는 성도분들이나 학생들을 얼마나 아군으로서 사랑하고 있는가? 이 분들이 나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가? 이런 영적 테두리를 철저하게 치고 있는가? 물론,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인식은 잘못된 인식이다. 하지만, 목자의 태도로서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나 아니면 안 돼!'이다. 이런 각오로 영적 테두리를 치는 교역자 또는 교사와, "네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보내줄게~"라고 습관처럼 얘기하고 다니는 무관심한 교역자 또는 교사를 비교해 보라. 어떤 목자 밑에서 양육받고 싶은가?

참된 목자


사랑 타령에 취해 아군과 적군을 구분도 못하면서 그저 사랑이 많은 척 착한 사람 코스프레 하는 것은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참된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참된 영적 군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요한의 태도는 적군을 향해 무조건 총알을 발포하여 사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일서 1 : 3]


아군은 아니지만 '너희'에게도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여 '너희'로 하여금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임을 요한일서 초반에 선포하고 있다. 이것이 기본적인 요한의 기조인 것이다.  

마지막 때의 구조대원


이런 미묘하고도 복잡한 요한의 태도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 마지막 때에 등장하고 있는 '너희'의 무리에 속해있는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에게는 확실하게 선을 긋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사귐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때의 구조대원'으로서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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