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the Gospel Cafe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복음 다방' 입니다

말씀 묵상/출애굽기

쓰디쓴 인생

Gospel Barista 2024. 7. 1. 08:00
728x90

세상 사람들이 소주를 들이키며 하는 다양한 말들 중에 "소주가 달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쓴 소주마저도 달게 느껴질 만큼 인생이 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쓰디쓴 인생을 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게 살면서 1년에 한 번쯤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적당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삶을 상상하며 말이다.

소주가 달다?!


사실 실제로 이런 달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삶 가운데 쓰디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사회생활 또는 가정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달콤해 보이는 인생이어도 그 인생을 살아가는 본인이 느끼는 인생의 맛은 쓰디쓴 인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실질적으로 출애굽 한 시점을 따져보면 갈라진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의 물에 수장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의 이스라엘 민족은 인생 최고의 달콤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승전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후 정확히 3일 후 이스라엘 민족의 원망이 터져 나온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애굽기 15 : 22~24]


이 모습을 보며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는 출애굽을 경험해 놓고 3일 만에 물 좀 못 마셨다고 원망을 하지?"라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비꼬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목말라!!! 물 줘!!!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홍해를 건너고 애굽 군대가 수장된 직후 '승전가'를 불렀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승전가를 어떻게 불렀을 것 같은가? 입대 전 우울해서 고개를 떨구고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는 젊은이처럼 불렀을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를 내며 목청껏 부르지 않았겠는가? 거기에 아론의 누이 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tambourines)를 잡고 춤까지 췄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출애굽기 15 : 20]


이스라엘 민족의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로 뒤덮이지 않았을까? 1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춤추고 노래하고 나온 직후의 상태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가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이미 홍해를 건넌 첫날부터 성대가 찢어지기 직전의 상태였을 것이다. 이 상태로 3일간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도 사막에서 말이다.

이 상태에서 마라에 도착을 해서 물이 있길래 허겁지겁 마셨는데 물이 엄청 쓴 것이다. 당연히 쌍욕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지 않겠는가? 어떻게 보면 3일간 찢어지기 직전의 성대에 수분 공급 없이 사막을 걸으며 마라까지 간 이스라엘 민족의 대단한 인내심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3일간 사막에서의 갈증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3일 전 인생 최고의 달콤했던 순간은 이미 기억 속에 사라진 지 오래이고, 쓰디쓴 물의 맛을 보며 원망이 튀어나오는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애굽기 15 : 25]


마라의 쓴 물에 '한 나무조각(a piece of wood)'을 넣었더니 물이 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더 쓴 맛의 인생으로 인해 쓰디쓴 소주가 달게 느껴지는 개념이 아닌, 실제로 물이 달콤해진 것이다. '한 나무조각'으로 인해 말이다.

우리도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어떤 인생의 맛이 느껴지는가? 달달한 초콜릿과 같은 맛이 느껴지는가? 대부분은 쓰디쓴 인생의 맛이 느껴질 것이다. 이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에 당연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쓰디쓴 우리네 인생에 이스라엘 민족이 마라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을 달콤하게 바꿔줄 '한 나무조각'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한 나무조각(a piece of wood)


이런 '한 나무조각'을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한 나무조각'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이를 통해 쓰디쓴 이 세상에 구원의 문을 여시고 송이꿀 보다도 달콤한 여호와의 법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9 : 9~10]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 '한 나무조각'의 존재는 굉장히 특별했은 것이다. 갈증이 극에 달했던 순간 눈앞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단순한 갈증해소를 넘어서 달콤한 맛으로 입안 가득히 채워졌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한 나무조각'인 '십자가'는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에게는 목걸이나 귀걸이처럼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감히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도 없는 감격스러운 은혜의 복음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서의 십자가의 의미를 철저하게 점검했으면 한다.

십자가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달콤하게 바꿔주시고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나뉘며 예배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우리를 위함이지 않겠는가?

우리를 위해 주어진 이 '한 나무조각'을 통해 쓰디쓴 우리네 삶 가운데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이렇게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쓰디쓴 인생에서의 죄악의 유혹을 뿌리치며 목청껏 '승전가'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달콤해 보이는 죄악의 길로 가지 말고 실제로 송이꿀 보다도 달콤한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애국가와 태극기를 금지시켰다. 이때 이승만이 애국가 대신에 불렀던 찬양이 바로 찬송가 389장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이다. 이 찬양을 '승전가'삼고 하나님의 군사로서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가지고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원수 마귀 모두 쫓겨가기는
예수이름 듣고 겁이남이라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찬송 찬송합시다
믿는 사랍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세상나라들은 멸망받으나
예수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지옥권세 감히 해치 못함은
주가 모든 교회 지키심이라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백성들아 와서 함께 모여서
우리 모두 함께 개가 부르세
영원토록 영광 권세 찬송을
우리 임금 주께 돌려보내세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아멘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