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헤롯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 이유는 헤롯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으로 환생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마태복음 14 : 1~2]
세례 요한은 헤롯이 아내로 삼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에 요청에 의해 살해되었다.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기쁘게하니, 그가 그 딸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한다. 이에 그 딸은 엄마인 헤로디아의 지시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이로인해 세례 요한은 처형되었고, 그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예수님께 아뢰었다.
예로부터 머리를 자르는 처형방법은 꾸준하게 사용되어왔다. 예전에 한국 기독교 선교사가 중동의 무슬림 무장단체에게 붙잡혀 머리가 잘렸다. 북한의 수령은 자신의 외삼촌의 머리를 잘라서 몇일동안 광장에 걸어놨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흔한 사형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런 예시는 경악스럽고 공포심을 안겨준다.
하지만, 대중들의 희열을 끌어내며 머리를 자르는 잔인한 방법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혁명 때 대활약했던 '단두대' 이다. 기존의 세력을 모두 적폐세력으로 몰아 단두대에 세운다. 이로인해 단두대를 둘러싼 군중들은 희열을 느끼며, 이를 선동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린다.
이 프랑스혁명을 우리는 '자유', '평등', '박애' 를 달성한 최고의 시민혁명으로 배운다. 특히 '자유' 가 굉장히 강조되어 '프랑스' 하면 '자유' 가 떠오르게 만든다.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 은 이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사람을 단두대에서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내는 것이 자유라는 것인가?
오늘 날의 몇몇의 기독교인들은 '보수주의' 를 따른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몰아내자며 '보수주의' 에 광기수준으로 집착을 한다. 이 보수주의를 처음으로 집대성한 자로 평가받는 사람이 영국인 '에드먼드 버크' 이다. 이 자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자가 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 이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이성적 이라고 포장된 추상적인(실체가 없는) 원칙을 위해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런 프랑스혁명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영화 및 뮤지컬이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 이다. 대부분 정부에 대항하는 집회에서 많이 불린다. 홍콩 시위 때 한 사람이 기타치며 이 노래를 부르자, 그 도로 위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불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민주당에서 미래통합당으로 전향한 보수를 외치는 어떤 국회의원이 새로 당을 창당했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명확하게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것이고, 그것은 보수주의와 정 반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권력에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밖에는 없다. 적폐세력으로 몰린 이들이 역으로 자신을 적폐세력 취급한 자들을 적폐세력으로 몰아 단두대에 세우고 머리를 잘라버리겠다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코로나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이 때 교회들이 정부를 적폐세력으로 몰아 대통령을 탄핵시키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은 꼴이다. 냉정하게 바라보자. 이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가? 국회에서 안건발의 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에 가능하다고 한들, 진보세력들과 하는 짓이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머리가 잘리자 배를 타고 은밀한 곳으로 피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엄청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헤롯은 적폐세력이라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의 머리를 자르러 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해주시고,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기적 중 하나인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해오신 일들을 그대로 행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방향이다.
대통령이 누구건, 사회적 분위기가 어떻든간에 우리가 '성도' 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목숨다해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것.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도로써 따라야 할 사명이자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이 사명대로 꾸준히 행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를 죽이려는 세력들에게 고분고분 머리를 단두대에 내어주라는 것은 아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직후, 헤롯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무리를 보내시고, 그 가운데 제자들을 먼저 배로 피신시키셨다. 뱀처럼 지혜로우신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태복음 14 : 22~23]
예수님께서는 이 위험한 시기에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속에서도 기도를 놓지 않으신 것이다. 괜히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겠는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 이 가장 뱀처럼 지혜로운 것임을 명심하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목숨걸고 하나님을 붙들면서 기도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가야하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새로운 단두대를 준비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며 성도의 사명을 감당하자. 이것이 뱀처럼 지혜로운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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