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 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담의 족보' 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세기 5 : 1]
이 족보의 특징은 몇 세에 아들을 낳고 몇 세에 죽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을 '죽음의 족보' 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죽음의 족보에 예외도 있다. 이 예외의 주인공들은 7대손인 에녹과 10대손인 노아이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최초의 휴거의 주인공이고, 창세기 5장에서 노아는 죽은 나이는 언급되지 않는다.
참고로, 7과 10은 성경에서의 완전수임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죽음의 족보에서도 완전수에 해당하는 에녹과 노아는 죽음을 면했다. 괜히 하나님께서 "완전하라" 라고 하시겠는가? 이는 죽음의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에녹과 노아와 같이 죽음을 면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인 것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신명기 18 : 13]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perfect)
[마태복음 5 : 48]
창세기 6장으로 넘어와서, 성경은 갑자기 '노아의 족보' 라고 하면서, 창세기 5장의 죽음의 족보인 아담의 족보와 차별을 두고 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세기 6 : 9~10]
노아의 족보를 설명하면서 족보에 대한 내용보다도 노아에 대한 한줄평이 먼저 언급이 되어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는 것이 노아에 대한 성경의 한줄평이다. 이를 통해 최초의 인간이지만 죄의 길을 걸었던 아담과 노아를 철저하게 비교를 함으로써 죽음의 족보인 '아담의 족보' 와 '노아의 족보' 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노아의 시대는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지면에서 쓸어버리시려고 작정하셨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 : 5~7]
흔히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의 계획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코로나 확산과 백신 접종 계획이다. 본격적인 인간 통제사회로 진입을 하고 있으며, 제대로 검증이 되지도 않은 악한 물질을 전 세계 사람들의 몸에 수차례 주입을 하고 있다. 이로인해 죽음에 이른 수많은 사람들은 '연관성 없음' 5글자로 정리해버리고,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을 사회적인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는 1000만 기독교인이 있는 대한민국은 백신 접종율 세계 1위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운운하며 악한 백신을 앞다퉈 접종하고있는 이 사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가 마지막 때 임을 그 어느 때 보다도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그저 이 땅에서 몇 살에 죽었는지만 기록되는 족보에 속할 것인지, 아니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라는 평가를 받는 족보에 속할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백신과 동행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해야하지 않겠는가? 죽음의 족보에서 죽음을 면한 에녹과 노아의 공통점이 '하나님과 동행' 임을 잊지 말자. 이것이 마지막 때 환난을 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노아가 죄악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창세기 6 : 8]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는 것' 이다. 이 말씀을 보며 흔히 여호와께서 은혜라는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것 처럼 생각을 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전혀 다른 의미이다.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아냈다"
즉, 노아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주시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주어가 되어 적극적으로 주님의 눈을 바라보며 그 눈동자에서 은혜를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은혜를 입었다' 라는 것이다. 괜히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봐야 그 눈동자에서 은혜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 : 2]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 을 철저하게 바라보며 매 순간순간 그 눈동자에서 은혜를 찾아내자. 이것이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비법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때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좁은 길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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