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일본' 이라는 나라에 적대심이 매우 강하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점령하고자 쳐들어온 나라는 일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으로부터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을 했다. 그 이후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남침으로 또 한 번의 대한민국의 영토가 침략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일본' 하면 치를 떨며 증오심이 폭발하는데 반해, 한반도를 영토로하는 대한민국에 불법 정권을 수립하여 휴전선 이북의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적으로 통치하고있는 '북한 정권' 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는 북한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적을 북한정권이 아닌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놓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전파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친일파 인명사전' 을 발간한 '민족문제 연구소' 이다. 현재 이곳의 소장을 맡고있는 이가 임헌영씨 이다. 이 사람의 본명은 '임준열' 인데 북한의 전설적인 공산주의자 '박헌영' 을 존경하여 개명한 인물이다.
대중의 시선을 한쪽으로 몰아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좋은 전략이 바로 '공공의 적' 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선의의 경쟁을 하는 라이벌 정도의 적이 아니라, 찢어 죽여도 화가 풀리지 않을 정도의 공공의 적을 설정하여 대중의 화를 유발하고, 화풀이의 대상을 적절한 타이밍에 세워놓으면 대중은 그저 적절하게 화풀이를하며 암암리에 선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만들어놓은 '진지전(진지를 구축해서 전쟁을 치르는 전략)' 의 전략 중 하나이다. 사회적 '헤게모니', 즉,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점령하고 공공의 적을 설정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반하는 이들은 '다름' 이 아닌 '사회적 기준에 반하는 틀린사람' 의 프레임을 씌워 매장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수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친일파' 프레임에 갇혀서 역사적으로 매장당하고 있다. 그저 북한정권에 우호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만이 국가적인 영웅취급을 하고, 북한정권에 반하는 이들은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진 상태로 대한민국의 역적이 되어간다.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제강점기에 실시했던 '창씨개명' 을 활용하는 것이다. '박정희' 를 '다카키 마사오' 로, '이명박' 을 '쯔끼야마 아키히로' 로 부르면 자연스럽게 이들은 친일파가 된다. 하지만 희한하게 북한정권에 옹호적이었던 '김대중' 을 '도요다 다이쥬' 로 부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마치 '우리들의 영원한 슨상님' 으로 불리는 김대중이 친일파 프레임이 씌워지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보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을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면 자연스럽게 친일파 프레임이 씌워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이런 창씨개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과정에서 요셉은 바로로 부터 애굽식 이름인 '사브낫바네아' 를 부여받았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창세기 41 : 45]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면서 애굽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이다. 참고로 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나라이다. 이런 원수같은 나라의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요셉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사람이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람은 매국노로 취급하고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순간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엿과 계란 등을 던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써 묵묵히 해야할 일들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내는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다니엘의 친구 '아벳느고' 이다. 이 이름은 바벨론의 지혜의 신인 '느고' 의 종을 뜻하는 바벨론식 이름이며, 유대식 이름은 '아사랴' 이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 1 : 7]
남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시킨 바벨론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꼴이다. 그것도 바벨론의 지혜의 신의 종을 뜻하는 이름으로 말이다. 대한민국의 사회적 기준으로 바라보면 죽일 놈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벳느고를 포함한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건져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창씨개명 프레임에 시선이 고정되어 친일파로 낙인을 찍은 후에 그 사람을 바라보니, 매국노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격이다. 이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면, 요셉은 그저 창씨개명한 친일파와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에 치를 떠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요셉' 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아들이 창씨개명한 성경인물의 이름을 붙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와 같은 창씨개명에 강압적인 분위기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멋진 영어이름을 짓겠다며 창씨개명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적으로 이름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 가운데 국력이 약해지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이나 바벨론 보다 강했다고 가정해보자. 요셉이나 아사랴가 사브낫바네아 또는 아벳느고로 창씨개명 당했겠는가?
대한민국의 주적으로 여겨지고 있는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가?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 숙청하자고 수백번 외치고,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수천번 노래불러봤자 일본의 코는 납작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혜로운 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력을 향상시키고, 대한민국의 기술을 발전시켜 일본의 대한민국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노재팬을 외치는 이 땅에 일본의 도요타나 렉서스, 혼다 차량들이 뒤덮고 있는 상황을 보라. 오히려 일본에서는 현대자동차나 기아는 판매조차 못하고 있다.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자기위로에 빠져있는 미련한 민족이 되지 말자. 과거의 아픔을 계속해서 끄집어내면서 화만 키우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내야하지 않겠는가? 롯의 아내가 뒤돌아본 순간 소금기둥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이 사회가 설정한 옳고 그름의 헤게모니를 따라가지 말자. 옳고 그름의 기준은 사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한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 : 57]
성경은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이다. 사회적 기준에 휩쓸리지 말고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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