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애굽의 총리이다. 총리는 국가 차원에서 대우를 해주는 것이 기본이다. 대한민국만 봐도 총리는 의전서열 5위로 공관이 제공된다.
그런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를 해왔다. 애굽의 입장에서는 국빈대우를 하며 대우를 해줘야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요셉은 극심한 기근으로 무너질 뻔 한 애굽을 살려낸 국가적 영웅이다. 이런 영웅의 가족들이 이주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요셉이 형들과 아버지에게 건넨 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창세기 46 : 31~34]
바로가 직업을 묻거든, 애굽사람들이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니 목축하는 자들이라고 얘기하라는 것이다. 요셉은 그래야 고센 땅에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고센' 은 애굽의 끝에 있는 지역으로 애굽의 수도와는 거리가 있다. 애굽의 총리이자 국가적 영웅의 가족이 애굽의 수도 한복판에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면서 최고급 의복을 입고 최고급 낙타를 타도 부족할 것 같은데, 왜 굳이 고센땅에 살게하고 싶었을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한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고센은 애굽의 가장 끝에 있지만, 가나안 땅과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족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젠가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실 것을 염두하지 않았을까?
이렇게만 생각하기에는 굳이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목축하는 자라고 얘기하려는 의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쉽게말하면, 6.25 전쟁의 3대 전투 중 하나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가족분들이 한국으로 이민오는데,
"외국에서 푸세식 화장실 청소를 하던 사람입니다"
와 같이 소개를 하는 격이다. 굳이 왜 이렇게 소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요셉이 총리로 있었으니 애굽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대우를 해줬을 것 같은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인도네시아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보라. 이 사람을 내정한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 인도네시아 정서가 휩쓸지 않겠는가? 애굽도 동일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요셉에게 감사하며 친 요셉파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요셉 전에 바로의 꿈을 해몽하지 못한 이들이 반 요셉파를 조직해서 탄핵까지는 아니어도 이미지에 흠집을 내려고 애쓰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7년 대기근의 시기를 겪고있던 상황이었다. 애굽의 식량을 축내러 온 이들을 반길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요셉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애굽사람들이 신경쓰지 않도록 이들의 시선 밖에서 조용히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치안이 위험한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옷차림 부터 돈이 없는 사람처럼 꾸미라는 가이드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요셉이 형들과 아버지에게 이런 조언을 한 격이다.
모든 나라는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자국민과 외국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싸워도 자국민을 유리하게 여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대한민국도 동일하다. 이는 인종차별도 아니고, 텃세도 아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자녀를 더 특별하게 생각해서 보호를 하듯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외국인으로써 타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감당해야 하는 항목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학생비자일 때에는 취업을 할 수 없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교 졸업 전에, 즉, 학생비자 만료 전에 직장을 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비자로 비자를 교체해야 한다. 자신이 구한 직장에서는 이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 이 사람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야한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세금을 추가적으로 내면서까지 미국인들보다 뛰어난 무엇인가가 없으면 직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운 좋게 직장을 잡으면 그 다음으로는 영주권 신청을 하고 5~6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생활을 해야한다. 물론 직장에서 영주권 획득을 위한 스폰서를 지속적으로 해줘야 한다. 이렇게 운 좋게 영주권이 나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이는 미국인이 됐다는 것은 아니고, 미국에서 살 수 있는 권리만 준 것이다. 그 이후에 시민권을 신청하고 10년 정도를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 이 기간동안 문제라도 일으켜서 범죄기록이 남게되면 영주권은 바로 취소가 된다.
'범죄만 안일으키면 되겠네?'
라고 생각되는가? 지나가던 경찰이 자신을 쳐다볼 때 마다 '내가 뭐 잘못했나?' 라는 생각을 하며 행동을 더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즉, 삶이 위축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운전 중 경찰차를 보거나 걸으며 경찰을 봐도 별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동일한 상황이 자신의 삶을 옥죄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런 1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면 보통 나이가 직장에서 높은 자리로 승진해야하는 나이가 된다. 미국의 직장에서는 임원급의 높은 자리에는 정말 뛰어난 사람을 승진시키지만, 왠만하면 시민권자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 즉, 시민권을 겨우겨우 따낸 사람을 굳이 임원급으로 승진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갔어도, 실은 미국에 있는 회사에서 만년 대리나 만년 과장으로 근무하며, 미국에서 살고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미국의 큰 회사들의 왠만한 프로젝트는 보안문제로 시민권자만 참여시킨다. 즉,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잘 견뎌내면 다행이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이는 직장에서의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실제 생활하면서도 인종차별은 기본이고, 실제 백인 미국인 사회에 녹아들기는 진짜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의 높은 진입장벽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독하고 성실한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의사가 되려고 한다. 의사가 되면, 의사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사회적으로 보호를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우리나라랑 조금 다르다. 자신의 주치의 처럼 동네 의원을 다니다가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의원의 의사가 다른 의사를 추천해주는 시스템이다. 이 때 미국인 의사들이 굳이 한국인 의사를 추천하지 않는다. 즉, 의사 세계에서도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암의 최고 권위자도 미국에서 자리잡는데만 10년 넘게 걸렸다고 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석사, 박사과정을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마쳤다고 하자. 그 이후에 운 좋게 미국 회사에 취직하면, 시민권이 없으면 위에서 언급한 직장생활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아니면 교수를 하기위해 지도교수 밑에서 월급을 받아가며 버틴다.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교수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렇게 어설프게 버티다가 더 이상 지도교수가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되면 비자가 없어지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이 때 자녀의 나이가 중학생 정도가 된다. 이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자녀들이 적응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냥 불법이민자가 되어 일용직 페인트칠을 하며 전전긍긍 살아간다. 가족이 아프기라도 하면 보험을 들 수가 없으니 약국에서 타이레놀을 사서 먹는 것이 유일한 의료행위가 된다. 실제로 미국 대학가에 이렇게 살아가는 서울대 출신 박사 출신 불법이민자들이 널려있다고 한다.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이다. 아니, 현실이다. 이래도 외국에서 살고 싶은가? 요셉도 애굽에서 히브리인이 살아가야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형들과 아버지에게 애굽사람들이 증오하고 혐오하는 목축업을 하는 사람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막무가내로 외국생활에 로망을 갖고있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자신의 욕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분명 하나님께서 외국 생활을 허락하시기도 하신다. 하지만, 분명한 이유는 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생활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자. 애굽에서의 타지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향한 소망을 더 많이 품게 되지 않았을까? 이를 우리의 상황에 빗대어 보자. 악한 자가 공중권세를 붙잡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우리의 본향인 아버지의 집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지 않겠는가? 어설프게 화려해보이는 이 세상의 외국생활에 로망을 품지 말고 진정한 우리의 본향을 향한 로망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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