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가 발전을 할 때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가 몇 가지 있다. 경제발전과 함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질 높은 교육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토지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을 해야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이다. 한 국가의 영토에서 국민들이 어떻게 주권을 행사하느냐가 국가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국가가 지주의 땅을 무상으로 몰수했고, 이를 무상으로 소작농들에게 분배했다. 정확히 말하면, 무상몰수라기 보다는 유혈몰수였다.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지주들은 총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분배라기 보다는 무상소작이었다. 땅에 대한 매매권을 포함한 소유권은 국가에게 있고, 그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권리만 주어졌다. 그 마저도 잡단농장의 개념으로 수확량의 일정량을 국가에 바쳐야 했다. 자신의 땅이 아니다보니 당연히 농업의 효율은 저하되었고, 결과적으로 대기근이 찾아왔다. 소련에서는 이 대기근으로 인해 수백만명이 굶어죽었다. 중국에서도 집단농장의 폐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어땠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땅은 80% 가 지주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자작농 비율은 극도로 작았다. 소작료는 적게는 50% 였고, 많게는 60~80% 정도 였다. 이로 인해 당연히 지주와 소작농의 신분차이는 좁혀질 수 없었다. 즉, 국민들이 평등하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와중에 북한은 1946년 3/5 에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였고, 이 소식은 당연히 대한민국에도 전해졌다. 이에 국민들은 대한민국도 토지개혁을 해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미군정은 소작료를 1/3 만 내도록 하여 소작농들의 부담을 줄여줬지만, 이는 근본적인 토지개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지주와 소작농 간의 신분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여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농지개혁법' 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유상매입 유상분배' 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한 농가의 토지 소유 한도를 정하고, 농지개혁의 대상이 된 지주들에게는 국가사업 우선 참여권이 주어졌다. 이로인해 이들의 재산이 산업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시점은 1949년 6/23 이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기 시작했다. 1945년 말 대한민국 전체 경지면적의 35% 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에는 96% 로 치솟았다. 토지를 배분받은 농민은 5년간 수확량의 30% 를 국가에 내야했다. 어떻게 보면 수확량의 30% 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제시대의 소작료가 대게 수확량의 50% 였음을 감안하면 5년간 소작료를 할인받으면서 자신의 땅을 소유할 수 있게되는 제도인 것이다. 실제로 농민 입장에서는 이 제도로 인해 국민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충성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 제도 덕분에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신 소유의 땅이 생기는 것이 농민들에게는 얼마나 큰 이점인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고 첫 수확을 거두기 이전에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여 농민들이 자신의 땅에서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북한 치하가 된 지역에서 북한정권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시도했으나, 대한민국의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자신 소유의 땅을 갖을 수 있는 희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토지개혁의 방향성에 따라 한 국가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써 토지개혁을 어떻게 시행했는지를 살펴보자.
애굽과 가나안 지역은 극심한 가뭄기간에 진입했다. 다행히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한대로 요셉은 7년간 풍년의 시기동안 식량을 잘 저장해놓았다. 이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도 확보해놓은 식량 덕분에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요셉은 곡식을 팔아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했고, 이 수익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갔다. 이에 애굽과 가나안에는 돈이 다 떨어졌다. 이 가운데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요셉에게 곡식을 요청했고, 요셉은 가축과 곡식을 바꾸어 주었다. 다음 해가 되니, 애굽과 가나안에는 가축마저 사라졌다.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창세기 47 : 18~19]
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토지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이를 담보로 곡식을 줄 것을 요구한다. 즉, 스스로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창세기 47 : 20]
요셉은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쳤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애굽사람들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라고 되어있다.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and Joseph reduced the people to servitude,
from one end of Egypt to the other.
[창세기 47 : 21]
이 구절의 영어성경을 직역하면, '애굽사람들을 종으로 삼았다' 이다. 즉, 식량을 위해 몸과 토지를 팔았던 이들을 실제로 바로의 종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종자를 주며 농사를 짓게하고, 수확량의 1/5 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나머지를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도록 했다.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창세기 47 : 23~24]
이것이 요셉이 만든 애굽 토지법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창세기 47 : 26]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수확량의 1/5만 내면 나머지를 자신들의 식량으로 먹을 수 있으니 지혜로워 보이는가? 여기서 '사람들' 은 더 이상 '사람' 이 아닌 '바로의 종' 이다. '종' 에게 인권이란 없다. 그저 주인의 '소유물' 에 불과한 존재이다.
갑자기 요셉이 잔인하게 느껴지는가?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요셉이 나서서 애굽의 국민들을 노예화 한 것이 아니다. 애굽의 국민들이 자처해서 자신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인간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이 '기근', 다른말로 '굶주림' 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극한까지 굶게되면 스스로를 종으로 삼는대신 먹을 것을 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요셉은 이 가운데 바로의 종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한 것이다.
마지막 때를 하루하루 살아내고있는 우리들은, 이 요셉의 토지법의 대상이 된 애굽 국민들, 아니, 애굽 바로의 종들의 모습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7년간의 풍년 뒤 찾아온 7년간의 대 기근에 그저 종으로써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어리석게만 느껴지는가? 지금까지 은혜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7년간의 대 환란을 맞이하게되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 서로 적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다고 이마와 오른손을 내밀며 짐승의 표를 받고 스스로 죄의 종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겠는가?
짐승의 표를 받는 과정을 착각하지 말라. 엄청난 고문을 통해 기독교인들 한 명 한 명을 넘어뜨릴 것 같은가? 6.25 전쟁 당시 공산당원으로 전향시키는 방법은 2주간 감자만 주다가 갑자기 소고기 국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갑자기 들어온 육류를 소화시키지 못해 배탈이 나게 된다. 이 때 소화제 알약 하나를 보여주며 공산당원으로 전향하면 이 알약을 주겠다고 협상을 시도했다. 이 협상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 말씀을 읽으며 "나는 절대 안받을 자신이 있어!" 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중 과연 몇이나 안받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가? 굶주림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스스로 바로의 종이 된 것 처럼 스스로 죄의 종의 길로 전력질주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환란을 통과하며 버텨낼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자. 인간의 힘과 의지로 버텨낼 수 있는 환란이 아니다. 환란을 버텨낼 어리석고 쓸데없는 각오를 하지 말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로써 깨어 단장하자. 곧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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