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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바울서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연보 사역

Gospel Barista 2023. 4. 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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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고린도후서 9 : 1]


이 말씀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 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즉, 구제 헌금 사역을 뜻한다. 바울은 AD 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회의로부터 AD 57년 봄에 바울이 그동안 모았던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사역을 이어나갔다. 이 사역의 기록은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 사역을 이어나갔을까?

바울의 연보사역


이 바울의 연보 사역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다양한 서적과 논문을 통해 수많은 신학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이슈가 많은 내용이지만, 현재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사역이기에 바울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 사역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선, 바울이 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기독교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면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에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이방인 할례 의무조항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정리하고자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하게 되었다. AD 49년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등에 의해 이방인의 할례 의무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은 재정적으로 매우 빈곤한 상태였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회의 당시 다음과 같은 결정사항도 함께 있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
[갈라디아서 2 : 10]


즉, 예루살렘 교회회의 때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방 교회들이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본인의 주된 사역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의 정체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다. 실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예루살렘 교회 전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등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실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바울이 ‘가난’에 대해서 명기한 다른 바울서신을 보면 실제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용을 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향한 연보 사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성도를 위한 연보사역


그다음으로 이 연보의 강제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 연보를 이방인들이 원조 성도 격인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서 ‘성전세’를 지불하듯이 강제적으로 내야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양한 구절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반박할 수 있는데,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으로도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고린도후서 9 : 5]


이 구절의 마지막을 잘 살펴보라.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다. 즉,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는 강제성에 의한 것이 아닌 자율성에 의한 사역인 것이다. 실제로 마게도냐 교회는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으면서도 연보를 모았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8 : 1~2]


마게도냐 교회 사람들은 이 연보의 동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넘치는 기쁨’으로 꼽고 있다. 이로 인해 ‘풍성한 연보가 넘치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이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환난의 많은 시련’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정리하면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연보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개념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넘치는 기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즉,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기준 삼아 액수를 정한 것이 아니기에 풍성하게 넘치는 연보가 모인 것이다.

강제성?


그렇다면 굳이 왜 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예루살렘 교회에게 전달을 해야 했을까? 예루살렘 교회회의의 결정사항이기 때문에? 마게도냐의 다른 사람들은 사랑스럽지 않아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연보 사역을 하면서 신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일치성’이다. 즉, 이방 교회라고 예루살렘 교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아픔은 곧, 이방 교회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에 따라 사역을 이어 나갔고, 바울에 의해 세워지고, 그 가르침을 받은 이방 교회들은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교회를 자신들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고 도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연보 사역의 대략적인 개념이다.

일치성


이 바울의 연보 사역이 한국교회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한국 교회의 뿌리를 살펴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에 도달하게 된다. 즉, 대한민국의 신앙의 불씨는 ‘평양’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평양’ 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제2의 예루살렘인 평양 교회에서 공산당에 의해 핍박받은 기독교인들은 흩어짐을 당했고, 결국 6.25 전쟁 때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남한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기독교가 점점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에 의해 점령당해 전 세계로 흩어짐을 당했던 상황과 동일하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것과 같이, 제2의 예루살렘인 평양 교회는 경제적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한국 교회가 38선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제2의 예루살렘의 상황이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는가?

우선,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 또한 북한의 지하교회를 위해 강제적으로 무엇인가를 억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38선 너머에 있는 북한의 지하교회 즉, 제2의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을 위해 무작정 헌금을 모아서 어떻게든 보내면 되는 것인가? 무작정 돈을 보냈다가는 그 돈이 북한 정권으로 유입되어 더욱더 심한 기독교인 핍박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군사적 전략을 보충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바울의 목적은 단순한 ‘돈의 전달’ 이 아니었다.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일치성’을 연보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한국 교회도 제2의 예루살렘 교회인 북한의 지하교회와의 ‘일치성’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전 세계 기독교 박해 정권 1위인 북한 정권을 더더욱 압박하고 견제해서 무너지게 해야 할 것이다.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탈북민을 보호하고, 북한의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하고,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자신의 주된 사역 중 하나로 인식하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제2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이뤄나가고 있는가? 저들에게 나눠줄 하나님의 은혜와 넘치는 기쁨이 있는가? 저들과 한국 교회의 ‘일치성’을 항상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울과 한국 교회의 차이점이다. 그저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문제에 교회가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나아가 악한 일에 동참하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구별되었다고 착각하며 하루하루 목이 곧은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북한의 지하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대한민국 정부는 목숨을 걸고 탈북한 대한민국 국민을 살인자로 취급하여 판문점을 통해서 북송했다. 이를 위해 온갖 서류들을 조작하고 삭제했다. 탈북자를 향한 대한민국 국민과의 ‘일치성’ 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진 만행이다.

북한군은 대한민국 공무원을 바다 위에서 총살하고 그 시체를 불로 태웠다. 실제 대한민국 국민이 희생을 당해도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권을 향해 큰 소리를 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의 죽음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으니, 탈북자를 북송하는 것이 오히려 ‘일치성’에 부합된다고 하겠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과 북한 동포들을 동일하게 개, 돼지로 인식하고 있으니, ‘일치성’에 부합되는 것 같은가?

이들에 대한 검찰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니 이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은가?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애통함이 없다. 그러니 이에 대한 회개가 없다. 그저 정부의 책임으로 생각되는가? 그 정부를 세운 국민들과 한국교회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무관심과 무책임


정신 차리자.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괜히 105인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것이 아니다. 일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미국 교회의 선교사들이 눈엣가시였다. 일제의 핍박을 그대로 실시간으로 선교보고를 해버리기 때문에, 미국 교회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모든 상황이 전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일제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대 교수를 매수하여 칼럼도 쓰게 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지 말라고 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영어로 칼럼을 써서 미국으로 보내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도 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강제로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나라로부터 기독교인들을 구해내야 하는 것이 미국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니냐며 그들의 마음에 선교를 향한 불씨를 지폈다. 실제 수많은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 교회와의 ‘일치성’을 바탕으로 우수한 선교사들을 한국 땅에 파송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일제의 억압을 버텨내며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알고 보면 한국 교회도 미국 교회의 연보 사역을 통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의 성도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받은 국가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6.25를 통해 무력으로라도 북한까지 점령하여 북진 통일을 이뤄내고자 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었다. 북한 동포와 대한민국 국민의 ‘일치성’ 이 그 근간이 된 것이다. 자, 누가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 바울과 같이 제2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을 이어나가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은혜와 넘치는 기쁨을 그들에게 나눠줄 것인가? 누가 북한 동포를 마음에 품고 대한민국 국민과의 ‘일치성’에 기반한 기도를 심을 것인가? 이 글을 읽고계신 모든 분들이 제2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사역에 동참하는 '현대판 바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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