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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바울서신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 사도권 변호

Gospel Barista 2023. 4. 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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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묵상은 전도서 1장 9절의 말씀을 통해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전도서 1 : 9]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 진리의 말씀대로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 이 시대에 만연해있는 문제점들 또한 역사적으로 새로운 문제점들은 거의 없다. 동성애? 소돔과 고모라 시기에도 문제가 됐었다. 어떤 한 역사학자가 문명의 쇠퇴과정을 책으로 저술했는데, 대부분의 문명은 동일한 과정을 겪으며 무너졌다고 한다. 지역이 어디인지, 언어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대부분 문명의 부흥기에 접어들면서 근친상간을 허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성애가 만연해지게 되고, 더 큰 자극을 위해 수간으로까지 이어지며 별의 별 음란이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듯 그 문명을 뒤덮는다. 그러면서 그 문명은 무너져 내린다고 한다. 이는 문명을 포함한 인간의 흥망성쇠는 정의에 입각한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반복되는 것'과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의 내용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고린도후서 11장에서 12장은 사도바울이 격렬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한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고린도후서 11장 1절]


'자랑'에 대해서 큰 소리 쳤던 바울이 자신의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며 굳이 '자랑'을 곁드린 변호를 이어간다. 왜 그랬을까?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편지(고린도전서) 를 통해 믿음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면 아직 누룩과 같은 이들이 남아있었다. 바울에 대해서 음해하고 다니며 거짓 복음을 퍼트리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였던 '지극히 큰 사도(Super-Apostles)'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고린도후서 11 : 5]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린도후서 12 : 11]


자신의 사역에 사례금을 받지 않으니 거짓 사도로 취급하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고린도후서 11 : 8~9]


 

공격


이 외에도 수많은 공격거리들로부터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을 향해 온갖 음해와 거짓 증거를 들먹이며 온전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면 그 교회는 물론이고, 그 교회가 속한 지역, 더 나아가 문명과 국가가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토록 격렬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격의 주체이다. '고린도교회 내부적'으로 바울을 공격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제대로된 성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교회' 라고 명기하기에는 100%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고린도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있는 자들이니 '고린도교회 내부적'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사도 바울' 을 '교회' 또는 '기독교' 로 치환시켜보라. 교회가 교회를, 더 나아가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다.

'자유, 평등, 박애' 로 상징되는 프랑스혁명은 '적폐청산'을 위해 깨어있는(?) 시민들이 왕정과 귀족들의 목을 단두대에서 싹둑싹둑 잘라낸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혁명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혁명


이들은 이 혁명을 통해 교회 소유의 재산과 땅을 몰수했다. 그리고 성직자들을 핍박하고, 성직자의 권한을 박탈했다. 이를 옹호한 것이 프랑스의 교회들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 의 혁명이었으니 혁명 이후에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국가가 되었을 것 같은가? 나라는 더 부패해지고, 자유는 억압되고, 평등이라는 구호아래 국민들의 삶이 하향평준화 되어버렸다. 이에 토크빌이라는 프랑스인이 "이건 아니다!!"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민주주의' 라는 책을 통해 미국과 같이 올바른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잘 설명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그 핵심은 바로 '교회' 이다. 올바른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조용히 예배드리고 교회 안에서만 기도 하는 교회가 아닌, 적극적으로 삶 가운데 참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내는 이들의 모임이다. 혁명을 통해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박해했던 프랑스가 박애정신이 널리 퍼진 올바른 국가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애초에 모순이자 불가능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 프랑스혁명을 비판한 '에드먼드 버크' 는 자신의 책에서 "프랑스 성직자들의 재산이 몰수 당하고 권한이 박탈되며 목이 잘릴만큼의 큰 범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라고 명확하게 선포한다. 이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프랑스혁명의 실질적인 모습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이 프랑스혁명의 과정과 동일한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이 펼쳐지고 있다. '종교인 과세법' 을 통해 이미 세금을 잘 내고있는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다. 여기서 해당되는 항목은 '성가대 지휘자 사례금, 찬양팀 사례금, 수련회비 등' 교회에서 오가는 모든 돈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인식이 없던 왠만한 기독교인들을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며 시민의식이 없는 몰상식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적폐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법안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차별금지법을 통해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으려고 한다. 이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다. 바울을 공격했던 고린도교회 내부에 숨어있는 누룩들과 같이 말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면 교회에서는 동성애가 죄라고 선포하지 못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마지막에 간절히 외치고있는 이 말씀이 현실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 : 21]


이 세상의 흐름을 보니 조만간 기독교인들이 바울과 같이 도망다녀야하는 신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린도후서 11 : 32~33]


벽타고 건물을 탈출하는 훈련이라도 해야하나 싶다. 다같이 암벽등반 학원에 취미반이라도 등록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할까?

도망가야하나?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이는 올바른 복음을 위한 목숨을 건 변호였다. 3.1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일제의 우상을 타파하는 목숨을 건 복음의 변호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 첫 시작을 알린 기도는 대한민국을 복음에 기반한 믿음의 국가로 세우겠다는 다부진 선포였다. 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정신차리자.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사도권을 변호하겠는가? 복음이 복음되게 선포되어야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살고, 세상이 살아난다.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계속해서 핍박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역사적인 흐름이다. 그 가운데 누가 바울과 같이 사도권을 변호할 것인가? 이런 거룩한 영적 깡다구를 가진자가 되어 격렬한 영적 전쟁을 치르며 거룩한 복음의 가치를 변호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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