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스스로 증명하며 사역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의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에 '사도'로써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크다는 사도들(super-apostles)'이라고 표현했겠는가.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But I do not think
I am in the least inferior to those "super-apostles."
[고린도후서 11 : 5]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만이 진정한 사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 나아가 갈라디아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이스라엘의 영토를 벗어난 이방인의 지역이다. 하지만 마게도냐 지역처럼 이스라엘과 먼 지역이 아니라 마게도냐와 이스라엘의 사이에 위치한 중간지대이다. 즉, 이방인들의 지역이지만 유대인의 영향력이 여전히 미치고 있는 지역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사역할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함으로써 자신의 편지에 공신력을 부여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 1 : 1]
그리고 베드로를 할례자, 즉 유대인(Jews)을 향한 사역자로 삼으신 이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For God,
who was at work in the ministry of Peter
as an apostle to the Jews,
was also at work in my ministry
as an apostle to the Gentiles.
[갈라디아서 2 : 8]
즉, 바울은 이방인의 지역인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자신의 선포가 공신력 있는 선포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선포를 통해 우리는 갈라디아 지역, 다시 말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했을 것이다. 이런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여론을 인식해서 유대인 특유의 율법주의적인 행동을 취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Before certain men came from James,
he used to eat with the Gentiles.
But when they arrived,
he began to draw back and
separate himself from the Gentiles
because he was afraid of those
who belonged to the circumcision group.
[갈라디아서 2 : 12]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던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갑자기 뒷걸음질 치며 이방인들과 분리된 것이다. 이방인을 지옥 땔감 정도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눈에 자신이 율법을 어긴 사도로 여겨질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2 : 13]
그 결과 남은 유대인들과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 영향을 받아 베드로의 행동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바울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갈라디아서 2 : 11]
여기서 '게바'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베드로'이다. 그리고 '안디옥'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행해진 게바, 즉 베드로의 외식에 바울은 '대면하여 책망'으로 응징했다.
생각해 보라. 책망의 상대가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유대인 중에서도 1등 제자, 흔히 크다는 사도(super-apostle)이다. 이런 거물을 스스로 사도권을 변호하며 이방인 사역을 하고 있는 바울이 대면하여 책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 맞다며 베드로를 같이 책망하며 회개하기를 촉구했을 것 같은가? 아니면 베드로를 공격하는 바울을 견제했을 것 같은가? 바울은 이런 여론을 몰랐기에 눈치 없이 베드로라는 거물을 책망하는 실수를 범한 것 같은가? 아니면 거물급을 공격함으로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이용해 자신이 더 유명해지기를 바랐을 것 같은가?
바울은 진리, 그리고 복음 앞에서 타협이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죄를 묵도할 수 없는 사도인 것이다. 그 상대가 슈퍼 사도인 베드로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이것이 노빠꾸 사도, 바울의 모습이다.
이런 노빠꾸 사도를 갈라디아 교회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스스로 사도권을 변호해야 하는 바울이 이를 어떻게 수습했는지를 보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 : 16]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 '이신칭의', 즉 율법의 행위로 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바울은 또라이 노빠꾸 사도의 모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포가 '옳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실력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노빠꾸'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장이 술을 권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받거나 하는 경우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를 거절하면 또라이 노빠꾸 인생으로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다. 그 순간 용기를 내어 거절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자신을 향한 이런 부정적인 시선에 짓눌리어 위축된 삶을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노빠꾸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다면, 바울과 같이 실력을 쌓자. 우리의 노빠꾸의 모습이 '옳은 모습'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자.
현재 법무부 장관이 청담동 술자리 가짜뉴스에 의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당당하게 자신은 검사시절부터 회식도 가지 않았다고 선포했다. 이에 사람들이 "어떻게 회식도 가지 않고 저렇게 검사생활을 하며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을 수 있냐?"라며 비양양 거릴 때, 어느 한 패널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실력이 있으면 회식쯤 참석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없다"
이것(실력)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갖춰야 하는 덕목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이 뛰어나면 술 한잔 마시지 않는다고, 부당한 지시를 거절한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없다. 우리도 복음과 진리에 있어서 타협하지 말고, 각자가 속한 영역에서의 실력을 키우며 세상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자. 죄는 죄라고 명확하게 선포하는 노빠꾸 인생을 살아내는 크리스천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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