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율법'과 '믿음'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한다.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율법은 악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율법은 필요한 개념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런 잘못된 이분법적인 개념정리로 인한 또 다른 엉뚱한 비진리가 생겨나지 못하도록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경계선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찾아나간다.
기본적으로 율법은 '하라'와 '하지 말라'로 구분된다. 이 목적은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죄', 그리고 하면 안 되는 것을 하는 '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런 죄의 경계선의 역할을 하는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 : 2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다. 다시 말해 죄의 경계를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단계인 것이다. 이 단계가 왜 필요할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 : 45]
그리스도, 즉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죄와 공존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기에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으면 만사 OK 일까? 율법을 다 지키고 흠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옳은 삶의 모습일까? 다시 말해 의로운 모습일까? 위의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후반부 말씀을 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의롭다 함을 얻는 비법은 율법이 아닌 '믿음'이다. 즉,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의인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2018년도 대한민국 국민 10만 명당 범죄자 수는 3,410명이었다. 이는 3.41% 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96.59% 의 사람들은 준법정신을 발휘해서 법을 어기지 않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의인의 조건이라면 96.59% 의 사람들이 의인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의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돔과 고모라는 10명의 의인만 있었어도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0만 명당 96,590명의 의인이 있었던 2018년도의 대한민국은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되돌아보라. 매일같이 사건사고 소식에 조용한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의인의 조건은 준법정신이 아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것이 성경이 정의하는 의인이다.
그렇다면 율법과 믿음의 개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율법, 즉 초등교사를 졸업하고 그 아래에 얽매어있지 않는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라디아서 3 : 25]
이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단계이다.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와 삶의 모습이 죄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얄팍한 기쁨에 만취하여 살아가는 삶이 아닌, 실질적인 선한 일을 하며 열매 맺는 삶을 알아내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인 것이다. 율법에 이끌리어 물세례를 받고 자신의 죄를 죽이고 거듭났다면, 자신을 의롭게 여겨주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으며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내라는 것이다.
우리네 모습은 어떤가? 이런 신앙의 개념화가 되어있지 않은 성도들 중 자신은 의인이라고 우기면서 율법에 매여 죄의 경계를 명확화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중학생이 19금 성인영화를 보면서 베드신에서는 눈과 귀를 막았다고 우기면 법을 지킨 의로운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만 기억하고 술 먹고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다. 운전면허 정지나 취소가 되지 않을 정도의 혈중 알코올농도를 유지하면 취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것인가?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이어지는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회식자리에서 소주잔을 부딪히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 몸에 알코올을 들이붓겠는가?
성경을 단순한 율법서, 즉 죄의 경계를 정의하는 법전 정도로만 인식하니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죄의 경계를 정의하는 법전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써 내려간 하나님의 역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책이다. 성경을 붙들면서 초등교사를 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초등교사는 후딱 졸업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는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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