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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산상수훈

[산상수훈 묵상-018] 예수님의 기준 - 원수

Gospel Barista 2021. 5. 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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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원수' 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태복음 5:43]


우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에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8]


그러나,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조금 애매하다. 마태복음 5장43절의 '원수' 의 히브리어는 '에크드로스' 이다. 이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보면 모두 신약성경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구약성경, 특히 율법으로 여겨지는 모세오경에도 '원수' 라는 단어는 나오지만, 히브리어 기준으로 보면 다른 단어이다. 그리고, 주로 하나님의 '원수' 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이웃에 대한 '원수'의 뜻으로 쓰인 부분에서는 위의 레위기 19장 18절 말씀과 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5장 43 절에서 얘기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라는 말씀을 보면, 어디서 이들이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은 것일까?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정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내용이다. 자신의 이웃은 사랑으로 품지만, 자신에 반대되는 '원수' 는 철저하게 미워하는 자신들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의 모순을 정확히 집어내신 사건이 있다. 그건은 바로 어느 율법교사가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자, 그리고 자신은 율법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예수님께 이웃의 범위를 물어본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누가복음 10:29]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예시를 들어서 되물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0 : 30~36]


이 예수님의 물음에 율법교사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7]


율법교사의 대답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고 하시면서 마무리 지으셨다.

이웃은 내 혈연이나 지연 등으로 이어져서 원래 알고 지냈던 이들이 아니고, 내가 다가가면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거의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피하여 갔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수도이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사람은 오히려 죽어가는 이를 불쌍히 여겨 상처에 응급처치를 해주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가 돌보아 주었다.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 볼 비용도 지불하고, 필요하면 추가적으로 더 지불하겠다고까지 한다. 자신이 의롭고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율법교사는 찔릴 수 밖어 없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웃' 은 내가 다가가는 것에 달려있으므로, 대상이 누가 됐던지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원수' 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즉,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이웃과 원수를 분류해서 사람들을 대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이를 예수님께서 집으시며,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다가가 이웃으로 대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이웃을 우리의 몸과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말씀을 이어가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 : 44~47]


원수른 오히려 사랑하고, 단순히 원수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채찍질 하고, 못을 박고 십자가에 메다는 이들을 향해서도 기도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가복음 23 : 34]


자신을 찌르고 죽이려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셨다. 세리와 이방인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문안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들과 구별되어서 원수라고 여겨질만한 이들도 이웃으로 품어서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명확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마태복음 5 : 48]


예수를 좇는 삶, 증인의 삶,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삶은 하나님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흔히,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하고 완전하라고 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교회를 말씀하시면서 이기는 자들을 찾으신다. 죄에 질질 끌려다니며 매번 똑같은 회개를 하면서 겨우겨우 살아가라는 자들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아가며 매 순간순간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승전보를 울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우리는 이 말씀을 시험당할 때 위로의 말씀으로 삶는다. 위기의 관점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의 관점에서도, 우리가 충분히 감당하고 지키고 해낼 수 있는 명령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잊지말자. Be Perfact!!!


 

이웃.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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