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맹세' 에 대해 말씀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태복음 5:33~36]
사람들은 자신이 맹세한 것을 깨지 않고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걸면서 맹세를 해왔다. 이는 지금의 우리네 모습과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예를들면, 중고등학교때 유행했던 '엄창' 이다. 이는 자신이 한 말이 틀리면 엄마가 창녀라는 뜻이다. 이 외에도, 돈을 건다던지, 소중한 물건을 걸면서 맹세를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것일까? 그건은 바로 '신뢰' 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뢰' 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걸면서 얘기하고 주장해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뢰를 표현할 수 있는 무엇' 에 대해서도 지적하시며,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땅, 하늘, 예루살렘 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것이며, 이들을 걸고 맹세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다음 말씀 구절들을 살펴보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2]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8 : 17]
하나님께 맹세를 했다가 지키지 않는 상황이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을 성경은 '거짓 맹세' 라고 표현하고 있다.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미워하신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굳이 우리가 할 필요가 있을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맹세를 하고 지키면 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만, 주일 예배만 봐도 예배의 시작시간보다 늦게 예배당에 들어오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예배시간도 제대로 못지키는 성도들이 과연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한 것들을 100% 지킬 수 있겠는가?
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맹세한대로 지켜!" 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일들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즉, 맹세를 해야만 믿어줄 수 있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세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마태복음 5:37]
이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만 이해하는것은 쉽지 않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 말씀은 도대체 뭐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무조건 옳다! 옳다! 를 외치거나 아니라! 아니라! 를 외치면 된다는 것인가? 이것이 맹세와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인가?
이 말씀은 영어성경을 보면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간단하게, 우리의 '옳다' 가 진짜 '옳다' 가 되고, 우리의 '아니라' 가 진짜 '아니라' 가 되게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YES 라고 하면 YES 가 되며, 우리가 NO 라고 하면 NO 가 되게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맹세'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맹세'는 결국 '신뢰' 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내 말에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 더 신뢰될만한 것을 이용하여 맹세함으로 신뢰를 줄 수 있게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말이 YES 가 진정으로 YES로 믿어지도록 평소의 삶의 모습을 통해 신뢰를 얻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굳이 맹세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의 신뢰를 통해서 맹세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헛 맹세' 에 대한 기준인 것이다. 이 신뢰에서 벗어난 것은 '악(EVIL)' 으로부터 나는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즉, 신뢰가 아닌 사기, 거짓, 음해 등의 삶의 모습은 악을 쫓는 삶이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이들임을 명심하고, 굳이 맹세하지 않아도 신뢰를 줄 수 있는 거룩한 성도로써 하루하루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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