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자녀를 육아할 때 TV시청을 제한하거나 TV자체를 '악'으로 여기고 TV 없이 생활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녀가 TV대신 책을 보면서 지식을 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선택을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이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교에 진학시킨 부모들 중 TV를 없애고 책을 많이 읽혔다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모들의 말은 육아를 위해 집에 TV를 없애는 강력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TV'와 '책'중에서 학생들이 봐야 하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책'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책을 보며 그 안의 글을 읽는 사람은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하기 때문에 흔히 상상력도 좋아지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책을 선택할만한 좋은 이유들은 넘쳐난다. 반대로 TV는 정해진 내용에 대한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TV를 시청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육아를 하는 부모들은 자녀가 'TV'보다는 '책'을 읽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것이 만병통치약일까?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
"축구를 글로 배워서 그래!"
"선배 대하는 태도를 글로 배웠나 봐?"
이와 같이 글을 통해 배운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도 있다. 이는 대부분 인간이 실질적으로 행동하거나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어설프게 행했을 때 이런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글의 상황이나 감정적인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오해를 해서 받아들이고, 이런 모습이 실제 삶에 표출이 되었을 때 위와 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귀엽네"라는 글을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상황과 장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하는 이야기하는 장면
- 두 남자 중 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세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남자는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
- 술집에서 두 사람이 시비가 붙었는데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위의 3가지 상황만 봐도 같은 글이지만 뉘앙스와 배경장면이 천지차이이다. 즉, 무조건 책을 본다고 다 천재가 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보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되, 현실감각을 함께 성장시키며 현실에 녹여낼 수 있도록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는 마지막 때에 대한 정확한 타임테이블이 선포되어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8절]
이 글을 작성한 바울의 뉘앙스는 어떨까? 임박한 종말관에 사로잡혀 사회생활을 게을리하고, 자신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답답한 심정과 함께 '아직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아니야'라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뉘앙스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에 지금 이 시대의 한국교회를 향해 바울이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을 어떤 뉘앙스로 쓸 것 같은가?
우선, 글의 내용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8절까지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편지를 쓸 것 같다. 다만 뉘앙스와 어투의 차이가 극명할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라는 구절을 통해 '아직 배교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주님의 재림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임박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동일한 구절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향한 편지에는 "야! WCC, WEA 등을 봐!! 가톨릭은 이미 교회와 연합했다고 생각해서 이슬람과도 연합하는 지경이야!! 한국에서는 가톨릭과 교회의 연합을 추구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며 대형 축구경기장에서 행사를 크게 열었더라? 이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교회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결의를 했었더만? 유일하게 경남노회만 반대를 외쳤는데, 경남지역만 살아남았던 6.25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봐? 마지막 때가 장난이야?" 정도의 다급하고 긴박한 외침이지 않겠는가?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랍비들이 내년이면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을 정결하게 성결케 하는 데 사용할 재를 만드는 의식을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순결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제사장이 있고, 붉은 암송아지가 있고, 땅이 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1년 반만 더 기다리면 된다."라고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이 등장할 거룩한 곳, 즉, 제3성전의 재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인데, 어떻게 한국교회는 이를 이렇게까지 무시하고 있니? 목사라는 사람이 불법의 사람 코스프레하며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등의 선포를 공식적으로 하는 걸 보면 이 마지막 때 거룩한 성도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가 불법의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다?" 정도로 마지막 때를 향한 무관심을 지적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은 '마지막 때'를 글로만 배웠기 때문이다. 현실감각을 함께 성장시켜 이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휴거를 준비하는 거룩한 신부로써 깨어 단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저 성경 1독, 또는 성경 읽기에만 집중해서 글자를 읽고 넘어가는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때에 대한 한국교회 목사들의 관심이 없기에 마지막 때에 대한 설교도 거의 선포되지 않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교정과 바로잡아주는 이 없이 마지막 때를 자기 스스로 상상한 대로 받아들이고, 휴거는 머나먼 이야기로 치부하며 휴가계획이나 세우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글로라도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인식이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다. 이에 대한 인식도 없이 그저 교회 찬양팀에서 화려한 연주를 기대하며 각종 찬양팀 유튜브에 악기별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댓글이나 달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실정이다.
'마지막 때', 그리고 '휴거'는 머나먼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곧 펼쳐질 현실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발 좀 유심히 살펴보라. 이것이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이 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목숨 걸고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 편하게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사명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저 '마지막 때'를 글로 배웠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착실하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마지막 때'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마라나타'를 외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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