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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바울서신

삶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Gospel Barista 2023. 9.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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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다양한 것에 빗대어 표현하곤 한다.

- 인생은 마라톤이야. 길게 보고 꾸준히 전진해야 해!
- 인생은 한방이야! 크게 하나 터뜨려보자고!
- 인생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사이클이 있는 법이야.
-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짓밟히는 게 인생이야!
- 삶은 전쟁이야! 정신 차려!

이처럼 우리네 삶은 멋있는 말, 교훈적인 말, 현실적인 말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어떤 삶의 관점을 물려주고 싶었을까?

인생이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For I am already being poured out
like a drink offering,
and the time has come for my departure.
[디모데후서 4 : 6]


바울은 뜬금없이 '전제(a drink offering)'라는 단어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전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 중의 하나로 포도주나 독주를 제단 또는 제물 위에 부으면서 드리는 제사이다. 즉,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제사'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의 삶을 제사 중 전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를 묵상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선, 제사를 방법에 따라 화제(Fire Offering), 거제(Heave Offering), 요제(Wave Offering), 전제(Drink Offering)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화제는 제물을 번제단 위에서 불로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법이다. 화제에는 목적에 따라 번제(Burnt Offering), 소제(Grain Offering), 화목제(Peace Offering), 속죄제(Sin Offering), 속건제(Guilt Offering) 5가지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번제는 형편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나 기본적으로는 흠 없는 수컷을 제물로 태우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및 헌신과 봉사를 다짐할 때 드린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을 의미한다. 소제는 무교병이나 곡물을 태우며,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의 소유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는 제사이다. 화목제는 빈부에 따라 흠 없는 수컷이나 암컷을 태우며,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한 제사이다. 속죄제는 직책에 따라 제물이 상이하며, 죄사함과 그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제사이다. 속건제는 흠 없는 숫양을 태우며, 부지 중에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범죄 한 것을 사하기 위한 제사이다.

화제 (Fire Offering)


거제는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제사법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진 것을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주시는 개념이다. 화목제물 중 오른편 뒷다리, 땅의 첫 소산물, 십일조 등이 거제에 해당된다. 거제는 성소 밖에서 행해졌다.

요제는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 든 후에 위아래 또는 앞뒤로 흔드는 제사법이다. 의미는 거제와 동일하며, 화목제물 중 가슴부위, 땅의 처음 익은 소산물을 드릴 때의 제사법이다. 요제는 성소 안에서 이루어졌다.

전제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포도주나 독주를 제단 또는 제물 위에 부으면서 드리는 제사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전제는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주로 화제와 소제에 함께 드려졌다.

전제(Drink Offering)


바울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삶을 전제로 표현하고 있다. 전제는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는 제사법임을 감안한다면, 그전에 화제나 소제가 드려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화제나 소제의 제물은 무엇일까? 아니, 누구일까? 그는 바로 화목제물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몸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바울은 예수님의 화목제 사역에 동참하는 개념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은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없이는 드려질 수도 없는 전제의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 정도면 자신이 먼저 뜨겁게 회개했고, 수많은 이방 교회들을 세우고, 수많은 이들을 전도했으니 자신이 화목제물에 속죄제물까지 되어 하나님께 이것저것 다 태워드렸다고 우겨도 반박할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아웃백 스테이크 체인점 보다도 더 많은 곳에 제단을 쌓아 엄청난 고깃덩어리들을 태우고 다녔다고 주장할만하지 않겠는가? 이런 주장을 잠재우는 바울의 고백을 보라.

잘 태운 고깃덩어리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 : 10]


이것이 은혜 입은 자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자 고백이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닌 오직 자신과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자신이 스스로 화목제물이나 속죄제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제의 삶을 살았노라 고백하는 바울의 모습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게 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세례를 받기도 한다. 특히 성경학교와 같은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더더욱 마음이 우쭐해지기도 하며 흐뭇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회 행사


하지만 여기서 순간적으로 중심을 놓치게 되면 이 행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아닌, 자기 자신 스스로 이뤄낸 업적처럼 되어버린다. 이는 바울이 전제가 아닌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화목제물이라고 우기는 꼴과 같은 개념인 것이다. 항상 자신이 은혜 입은 자의 모습인지, 아니면 스스로 일궈낸 업적에 심취해 있는 자의 모습인지 점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의 삶을 전제라는 제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제사의 과정을 통해 이를 조금 더 묵상해보고자 한다. 제사에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 그리고 제사자가 조심스럽게 끌고 오는 제물,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제단, 그리고 제사장이 필요하다.

제사자가 흠 없는 제물을 조심스럽게 데리고 오면, 안수를 한다. 그리고 제물을 직접 죽인다. 그 피를 제사장이 뿌리고 남은 피를 제단 아래에 붓는다. 그 후 제물을 제단에서 태우고, 하나님께서 이를 흠향하신다.

죄인인 제사자가 흠 없는 제물에 안수할 때 제사자와 제물 사이에서 1가지씩 맞교환이 이루어진다. 바로 '죄'와 '흠 없음' 즉, '거룩'이다. 죄인의 죄가 제물에 전가되고, 제물의 흠 없는 거룩함이 제사자에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제사자는 거룩하게 여겨주시고, 제물, 즉, 죄를 불태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고기를 좋아하시는 육식주의자가 아니라 죄를 불태우기 때문에 이를 기쁘게 흠향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안수


지옥이 왜 불로 타고 있을까? 제사의 관점에서 죄가 전가된 제물은 불로 끝까지 태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옥에 갈 자들은 흠 없는 제물에 안수를 하지 않았기에 자신들에게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기에 이 죄의 대가를 지옥불을 통해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는 안수를 했던가? 구약에서는 직접 제사자가 제물에 안수를 했지만, 예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주셨다. 우리는 제사자로써 이를 '믿음'으로 안수를 한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다시 바울의 전제를 이 개념으로 바라보자. 바울은 자신이 전제의 포도주로써 '부어졌다(Poured out)'고 고백하고 있다. 즉, 바울은 제사자가 아니고 제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사자는 누구일까? 그들은 바로 바울을 죽이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이들은 제사자인 바울을 죽이는 사람들이며, 바울의 죽음은 전제의 예배로써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시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많은 이들을 구원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애절하게 호소하는 바울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이것이 바울, 아니, '사도'의 삶이다.

우리는 흔히 '사도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입으로 쉽게 고백하고 있으나, 사도 바울이 직접 보여준 제사의 관점으로 바라본 '사도적 삶'은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문구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도적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있으랴. 바울의 전제(Drink Offering)까지는 아니겠지만,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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