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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바울서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민족성이 중요할까?

Gospel Barista 2023. 9.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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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민족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흔히 선민사상을 갖고 있다고 하며, 미국인들은 개인주의가 강하다고 한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유명하며, 남미 사람들은 술과 마약, 그리고 축구에 미쳐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며, 중국인들은 시끄럽다. 이렇게 각 민족별로 민족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이나 국가로 선교를 가거나 사역을 하게 되면 그 민족의 민족성을 미리 공부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전략을 수립하곤 한다.

다양한 민족


그렇다면 디도가 사역했던 그레데섬 사람들의 민족성은 어땠을까?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1 : 12~14]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악하고, 게으른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민족성을 고려해서 복음도 거짓말 속에 녹여내고, 악한 행실 가운데 슬쩍 복음을 녹여내고, 게으르기 때문에 예배는 저녁 5시 정도에 드려야 하는 것일까?

바울은 디도에게 명확하게 이런 자들을 '엄히 꾸짖으라'라고 명령한다. 영어로는 'Rebuke them sharply'로 날카롭게 꾸짖으라는 것이다. 민족성을 고려하기는커녕, 이런 민족성을 엄하고 날카롭게 꾸짖으며 민족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라는 것이 바울의 디도를 향한 사역의 지침이다.

꾸짖다


더 충격적인 것은 디도서에 명기된 교회의 장로와 감독의 기준이 다른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선포한 기준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민족에 맞게 민족성을 잘 나타내는 리더를 세우는 것이 아닌, 그저 성경대로의 장로와 감독을 세우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민족성을 고려하여 그 민족을 잘 융합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가 장로가 되고 감독의 직분을 맡아야 할 것 같지 않는가? 만약에 이렇게 민족성이 중요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양한 민족성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12제자는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갈릴리 출신이다. 심지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120명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갈릴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갈릴리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태복음 4 :15]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을 보라. 이방인은 지옥 땔감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갈릴리는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못 배운 자들의 고향이자, 당시 빈민들이 모여 살던 가난과 무지와 보잘것없음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택하셔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복음 앞에서는 민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얼마나 올바른 믿음을 갖고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헛된 민족성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자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여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성경대로 장로와 감독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 우리네 민족성은 어땠을까? 당시 외국인들의 기록을 살펴보자.

우리네 민족성은 어땠을까?


조선에 희한한 '종족'이 있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담뱃대나 물고 누워있는 종족이다. 이처럼 게으른데도 부자의 대부분은 이들 종족이다. 그들을 가리켜 '양반 종족'이라고 부른다. 일하지 않으면서 부자인 양반 종족과 정반대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난해야 하는 부류가 있다.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에 아직도 노예제도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겠는가.
- 일본인 혼마 규스케

거기에는 직업도 없고 어떤 종류의 일도 하지 않는 수천 명의 특별한 존재가 있다. 이들은 길을 거닐고,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며, 옛 지혜의 심오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선비 역할을 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이 바로 양반 혹은 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한문 공부를 해서, 국왕 폐하께서 이런 무가치한 인간 벌레들에게 관직이라는 은총을 내리면 그것을 감읍하여 받아들일 존재들이다.
...
어린 딸에게 지어주는 이름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곧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딸은 어린 꽃, 어린 소, 어린 돼지, 또는 무엇이든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불러 가족 내의 다른 아이들과 구분한다. 때로는 일순이, 이순이 등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태어나는 순서로 이름을 삼기도 한다. 종종 'Sorrowful'의 의미를 갖는 '섭섭이'로 부르기도 해서,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어린것은 자신이 가족에게 슬픔을 가져왔다고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들 어린 아내들은 문자 그대로 이 집에 끌려온 노예들이다. 어린 소녀들은 결혼하기 전이나 후나 다를 바 없이 시어머니의 집에 들어온 그날부터 시어머니에 대한 복종의 인습에 속박된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노예로서, 방앗간에서 식량을 준비하고 그 집안에 노비가 있었더라면 노비에게나 맡겼을 온갖 종류의 가사를 다 맡게 된다.
- 미국인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


복음이 들어올 당시, 이 땅의 민족성은 노예제도에 가까운 신분제도와 극심한 남존여비에 의한 남녀차별이었다. 이는 바울이 디도에게 권면한 '엄한 꾸짖음'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니다. 누가 양반을 꾸짖을 수 있겠는가?

노예제도


신분제도의 가장 밑바닥이었던 '백정'이 당했던 처사를 살펴본다면 감히 양반의 눈도 똑바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개성에서 한 백정이 결혼식 때 양반들이 쓰는 갓을 한 번 썼다는 이유로 군중들이 그 집을 불로 태우고 돌을 던지며 백정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백정각시 놀이'를 아는가? 장이 서는 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농꾼들이 신명 나게 북과 꽹과리를 치며 행진하곤 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둘러섰을 때, 행진하던 농꾼들이 백정의 딸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끌어낸다. 치마를 벗기고 소처럼 끌고 다니거나 말처럼 기어가게 한 다음 등에 올라탄다. 백정각시 놀이가 시작되면 백정들은 소머리나 계란 등을 바쳐야만 그들의 딸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백정의 입 찢기 사건'이란 끔찍한 일들도 있었다. 백정에게 "자네"라는 말을 들은 한 상민이 밤에 백정의 집에 쳐들어갔다. 곤히 자고 있는 백정을 습격해서 입을 찢어놓았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백정의 입 찢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잇달아 일어났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귀 무덤, 코 무덤 이야기에 다들 분노를 금치 못한다. 동족을 노예로 부리고,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며, 입을 찢고 다닌 역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이 역사 또한 일제가 뒤에서 몰래 시킨 것이라고 우기고 싶은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과거의 제국들이 노예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이처럼 동족을 노예 삼는 민족은 극히 드물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양반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네 민족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신분제도를 폐지하고자 했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으로 실시된 정책들 중에는 명확하게 신분 해방에 대한 명시적인 조항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수백 년 동안 이어졌던 관습이 이런 법적 조항들로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신분제는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습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양반들이 부자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토지'와 '노비' 때문이었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농사를 지었다. 농업에서 제일 중요한 두 가지는 '농토'와 '노동력'이다. 땅이 있고 농사지을 사람이 있으면 수확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양반들은 땅을 소유하고 노비를 부렸기에, 일하지 않고도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즉, 이런 조건의 신분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정과 노비들의 경제적 독립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완전하게 신분제가 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이승만의 토지개혁이었다.

더 나아가 당시의 교육은 양반들에게만 집중되었다. 노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도 교육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양반들끼리 국가를 이끌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울 것이 예견된 결과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승만은 토지개혁과 더불어 교육혁명을 통해 한글을 보급하고 남녀 차별 없는 의무교육을 현실화했다.

토지개혁의 결과 우리나라 전 경작지의 95.7% 가 소작지가 아닌 자작지가 되었다. 농지개혁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일본의 경우에도 자작지 비율이 90% 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통해 '사농공상'의 신분제는 없어지고 온 국민이 평등한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이다.

토지혁명


교육혁명을 통해서는 건국 헌법 제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가 명기되었다. 이 헌법 이전까지는 자녀의 교육권은 부모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으로 인해 교육의 권리는 부모가 아닌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에게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국가에 부여했다. 이 법의 문구에 '적어도'라는 표현이 있다. 향후 의무교육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이승만의 교육혁명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6.25 전쟁 때의 일이다. 피난온 대학생들을 전시 연합 대학에 모두 등록시켜 교육이 끊기지 않게 했고, 이들은 군 입대를 시키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낙동강에서 목숨을 건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시점이다. 한 명의 군인이 아쉬운 시점인데, 군인으로서 가장 활용하기 좋은 나이대의 학생들을 입대시키지 않고 대학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여론이 어마어마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이 끝나고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없다."며 버텨냈다. 결과적으로 이 결정은 전쟁 중에 인재를 구출한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한 세대를 구출한 것과 같다. 전쟁으로 20대 남성 대부분이 전사했다고 생각해 보라. 한 국가의 인구 중 한 세대가 텅 비게 되는 기형적인 인구분포를 갖게 될 것이고,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게 될 것이다.

전쟁 당시 야외 중학교에 적혀있던 글귀이다.

"이곳은 우리의 싸움터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자유롭게 하는 길을 배운다."

전시 상황에서 학교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5,000년 문맹으로 살아온 백성들이 글자를 깨우치고 지식을 배워서 국민으로 거듭나는 전쟁터였던 것이다.

교육혁명


이것이 우리네 민족성을 무력화시키고 복음전파의 밑바탕을 만든 역사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영적으로 개간한 사람이 이 땅의 크리스천 리더였던 것이다. 이렇게 영적으로 개간되어 열매를 맺은 대한민국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으면서 이에 대한 감사를 하기는커녕, 그저 이 역사를 부인하고 정확히 이런 민족성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 북한정권의 편을 드는 자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글자문맹률을 낮춰놓았더니, 현실과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현실문맹자, 역사문맹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잘못된 민족성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선포하고, 말씀대로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바울이 디도서를 통해 디도에게 사역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한 사례가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보니 매우 거창한 일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우리 주변의 사례를 살펴보자. 교회학교에서 성경학교를 준비할 때 교사들은 회의를 하며 서로 의견교환을 한다. 다양한 의견들이 책상 위로 던져지는데, 이런 의견들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아이들은 오랜 시간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니 기도회는 짧게 합시다!"
"교사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아이들이 무서워할 수도 있으니 방언기도는 자제합시다!"

이런 의견 있죠?


이런 의견들은 아이들의 '민족성'을 고려해서 그에 맞춰서 복음을 전하자고 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바울이 디도에게 선포한 내용의 정반대로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바울의 선포대로 '엄히 꾸짖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을 모르는 성경문맹자들이 교사를 하다 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크리스천 리더의 교육혁명을 통한 혜택을 받은 수혜자로써 성경문맹자가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설픈 민족성을 내세우지 말고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되자. 이것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이다.

※ 참고문헌 : 이호,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교육혁명], 백년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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