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3장의 시작과 끝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우선, 디모데후서 3장의 시작은 이렇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 : 1~5]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 즉, 마지막 때 사람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나열하였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과 대동소이하다. 아니, 정확히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인 예고와 칼부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학교 폭력과 성 문제들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주변에 아직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마나 성폭행범이 득실거릴 수 있다는 것이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생각이 되어버린 시대이다. 이는 마치 이 땅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가 범죄자들이 방치되어 득실거리는 감옥이 되어버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감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각 나라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감옥의 역할은 다르다. 어떤 감옥은 그저 범죄자나 사형 집행 예정자들을 가두어 놓는 곳이기도 했고, 어떤 감옥은 범죄자들을 이 세상과 격리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감옥은 어떤 곳일까?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을 '교정직 공무원'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교도관'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교도소나 구치소 등에서 재소자를 관리하고, 교화, 교정에 관련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교화란 재소자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사회에 다시 잘 적응해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즉, 대한민국의 감옥은 재소자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평생을 죄수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소자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감옥이 되어버린 현재의 대한민국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최근 발생하고 있는 잔인한 범죄들의 원인을 솜방망이 처벌, 또는 적당한 법의 부재를 꼽는다. 그렇다면 처벌을 강화하고 법의 그물망을 더욱더 촘촘히 만들면 상황이 개선될 것 같은가? 대한민국 보다 처벌을 강하게 하는 나라들은 범죄가 없는 에덴동산과 같은 상태일까? 최근 들어 유명한 해외 축구선수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하고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치안'이다. 밤에도 여자들이 청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눈에 띄게 넣고 다녀도 안전한 나라라며 감탄을 한다. 우리나라보다도 엄격하게 범죄를 다루는 나라들도 심각한 범죄는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최근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이 종교계 인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짧게 전했다. 감옥의 재소자들의 교화에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계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해당될 것이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누군가(신부)에게 털어놓았다는 심적 안정감 정도는 취할 수 있으나, 실질적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원동력을 공급받기는 쉽지 않다.
불교는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부처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 동일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개념이다. 이는 양반다리를 한 금신상 앞에서의 자신의 맹세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삶에서 동일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원동력은 자기 자신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죄를 범했던 상황과 동일한 상황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면 삶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동일한 결과가 도출되기 마련이다. 삶의 실질적인 변화와 자신의 맹세는 결코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나머지 기독교를 살펴보자. 우선 기독교는 자신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이 사회에서 저지를 죄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죄를 자신의 고백이나 맹세를 통한 단순한 결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평생 묵을 숙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인 우리가 감히 들어갈 수도 없는 거룩한 곳이다. 그런 곳에 우리의 처소를 예비해 주신다는 것은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믿게 된다면 성경대로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 : 4]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단계가 바로 재소자들의 교화과정이 되는 것이다. 즉, 복음을 통해 실질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복음의 실체가 명기되어 있는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기독교 종교행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접할 수는 있지만, 1주일에 30분 정도의 설교를 통해 얼마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 성경을 읽고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교화의 지름길이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사울도 바울로 거듭나서 의인으로 살아갔다. 이런 바울이 성경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 : 16~17]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 바로 성경이다. 감옥과 같은 이 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책인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한성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실질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성경을 통해 삶이 변화되고 거듭난 사람들의 역사는 셀 수 없이 많다. 죽음의 그늘이 뒤덮은 대한민국에 생명을 공급하고자 목숨 걸고 이 땅으로 왔던 선교사들이 괜히 성경 보급에 열심을 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잔인하고 살벌한 죄악이 가득해진 이 땅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깊은 어둠이 뒤덮은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어둠에 묻혀 그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인가?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돋보이게 되어있다. 특히 짙은 어둠 속에서는 빛의 줄기도 명확하게 보인다. 빛의 줄기를 따라가면 빛의 근원도 보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둠 가득한 이 땅에 성경을 통해 빛을 비춰야 한다. 어둠이 짙은 만큼 성경의 빛을 통해 그 근원이신 하나님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면, 감옥과 같은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재소자들의 교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교정직 공무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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