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생뚱맞은 내용의 구절이 있는 경우가 있다. 신명기 7장 22절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신명기 7 : 22]

물론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해보지 않으면, 무심코 읽고 넘어가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고 반박할 거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기존의 민족들을 짧은 시간 안에 죽이면 왜 들짐승들이 번성할까? 땅은 넓은데 이스라엘 민족의 수는 적어서 방치되는 땅에 야생동물들이 번성할까봐?
-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인데, 들짐승이 번성하여 이스라엘민족을 해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들짐승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지 못하시는 것일까?
- 들짐승을 붙잡아 가축으로 만들어서 제사 때 제물로 사용하면 안 되나?
실제로 위의 1번 내용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수는 적어서 빈 땅에 야생동물들이 서식해서 이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 근거 말씀으로 신명기 7장 7절 말씀을 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 : 7]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적은 것은 맞다. 하지만, 이 때문에 들짐승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관 짓는 것은 억지스럽기도 하다. 즉, 1번 내용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내용으로 신명기 7장 22절의 말씀이 100% 온전히 설명되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이를 고민해 보기 위해 신명기 말씀의 대상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입성 직전인 광야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 2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들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까?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신명기 6 : 3]
힘들게 광야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의 이미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허락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런 땅의 모습을 그려보면 어떤 그림이 될 것 같은가? 영락없는 '에덴동산'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함께 계셨다. 평화로운 나날들이 펼쳐졌을 것이며, 나무마다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이니 만큼 '최소(?)' 에덴동산 수준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1세대 광야생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이 모습들을 전해 들은 이들은 아무리 약속의 땅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을 기억한다면, 광야생활 2세대 이스라엘 민족들은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더 크지 않았을까?
이런 이미지 가운데 공교롭게 신명기 7장 22절 말씀과 오묘하게 대조되는 말씀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이 땅에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 : 24~28]
원래 '짐승'은 인간이 다스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신명기 7장 22절에서는 '짐승'이 인간을 해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참고로 신명기에서의 '짐승'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창세기에서의 '짐승'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모두 '하이'로 같다. 즉, 신명기와 창세기의 '짐승'은이 다른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개념이다. 이 '짐승'이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에서 인간을 해하는 존재로 바뀐 이유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세기 3 : 18]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 땅에 '죄'가 들어왔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죄'로 인해 엉클어져 버린 것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죄'의 모습이다. 이 관점으로 다시 '짐승'을 바라보면,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인간을 해하는 존재로 변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죄'로 인해서 말이다.

'에덴동산'의 이미지를 꿈꾸던 광야 2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신명기 7장 22절 말씀은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정체가, 자신들이 그리던 '에덴동산'의 모습이 아니라고 선포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지만,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창조질서가 무너져있는 땅임을 명확하게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기를 원하셨을까?
'에덴동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함께하는 삶'이다. 아담과 하와는 매 순간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이 모습이 바로 '에덴동산'의 모습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제사'말고는 없었다. 즉, '에덴동산'을 향한 꿈을 가나안 땅에 투영시켰던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여전히 '제사'가 필요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민족이 품었으면 하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한다고 하면서 힘겹게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는 결정을 하기라도 하면,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니까 앞으로는 시온의 대로와 같은 평탄한 길만 걸을 거야!"라는 기대감을 갖곤 한다. 하지만, 신명기 7장 22절 말씀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한다는 것이 곧 이 땅에서 '에덴동산'이나 '천국'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조차도 야생 동물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할 이유가 없어진 것일까? 착각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호의호식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창조질서가 무너진 이 세상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로 살아감으로써 창조질서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모습과 같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아담 2, 하와 2를 만드시지 않으시고,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모세에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제사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위기 1 : 1]
제사법을 알려주시는 레위기 1장 1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먼저 부르신다. 제사는 이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즉, 예배는 창조주이자 왕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예배를 빠질만한 온갖 핑곗거리들이 난무하고 있다. 가족여행, 친구와의 약속, 각종 시험 등과 같이 말이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우선순위를 잘 생각해 보라.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애타게 부르시는 '예배의 자리'를 하찮고 귀찮은 자리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 들짐승이 이스라엘 민족을 해하듯이, 마귀가 우리를 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삶 가운데 예배의 자리를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추가적으로 피조물인 우리의 모습을 짐승의 모습에 투영시켜 보자. 에덴동산에서의 짐승은 창조질서대로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다. 하지만, 신명기 7장 22절의 짐승은 창조질서가 무너져 인간을 해한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왕 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런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질서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에 후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짐승만도 못한 삶이지 않겠는가? 짐승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창조질서가 무너져가는 이 땅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세워나가는 멋진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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