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에 대한 말씀은 교회를 다니는 이들에게 있어서 너무 유명하고, 동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이기 때문에, 유치부나 유아부용 설교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로 남자만 5,000명을 배불리 먹이고 12개의 바구니가 가득차게 남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인식이 되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때문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도 이 오병이어의 내용은 "오병이어네?" 하고 굉장히 속독으로 대충 읽고 넘어가곤 한다.
나 자신 또한 오병이어의 말씀을 스스로 동화처럼 여기고 가벼이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번 누가복음 9장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읽어보니, 나의 오병이어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이렇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벳새다' 라는 고을로 가셨으나 수많은 무리들이 이를 알고 따라왔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해주시며, 병 고칠 자들을 고쳐주셨다. 당연히 시간은 흐르게 되었고, 날이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이에 제자들이 이 무리들을 주변의 마을로 돌아가게 하여 알아서 저녁을 먹게 하고 숙소도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권유했다. 누구 한 사도의 제안이 아닌, 열두 사도 모두의 권유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너희가 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줘!" 라고 하셨고, 그들의 손에는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뿐이었다. 이에 이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는 이것 밖에 없으니 음식을 사지 않으면 불가능 합니다!" 라고 당돌하게 얘기를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50명씩 앉게 하시고 그 유명한 축사를 하신다. 그리고 이 음식들을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을 제자들이 열두 바구니에 수거하게 하셨다.
우선,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나는 어린이 찬양에도 나오지만, 12바구니(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 먹다 남은 음식이 아닌, 온전한 새것의 물고기와 떡이 남은 것으로 생각했었다. 먹고 배가 차지 않은 자들을 위한 애프터서비스와 같은 느낌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12바구니에 담긴 것은 남은 조각들이었다. 영어 단어로는 'Left over' 즉, 식사 후 남은 음식, 다른 말로 음식물 쓰레기 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무리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나 생선 뼈 조각들을 제자들보고 바구니에 수거하게 하셨을까? 그 정답은 요한복음에 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한복음 6 : 12]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왜 버릴 것이 없게 해야했을까?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육의 양식인 음식을 공급해주셨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살아가면서 섭취해야하는 양식은 떡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 : 4]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 : 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 : 14]
이를 정리해보면 영의 양식, 즉, 말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의 양식인 떡과 물고기를 무리들에게 공급해주신 것이다. 이 가운데 육의 양식 중 버리는 것이 나오게 된다면 이를 공급하신 영의 양식 되시는 예수님이 뭐가 되겠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 : 18]
말씀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 질 것이다. 즉, 버릴 것 하나 없는 것이 말씀이자 우리의 영의 양식인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가 들판에 버려지지 않게 함으로써 이를 공급해주신 영의 양식인 말씀도 버려지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굳이 제자들에게 음식물 찌꺼기들을 바구니에 수거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빨 사이에 끼인 생선의 가시 정도로 인식하고 짜증내며 혓바닥으로 이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떡은 맛있게 먹고 손으로 잡은 끝부분은 더럽게 여기며 버려버리듯이 말씀의 일부분을 던져버리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시선을 점검하자.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사건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녹아있다는 것인가?
당시 남자만 5,000명이 있었다. 흔히,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20,000명 정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을 50명씩 그룹지어 앉히셨고, 사도들이 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남은 음식들을 수거하게 하셨다. 이 상황을 정리해보자.
20,000만명을 50명씩 그룹지었으면, 400개의 그룹이 있었을 것이다. 사도의 수는 12명이었으니, 한 사도당 약 33개의 그룹을 담당한 것이다. 한 그룹당 50명이었으니, 결국에는 한 사도당 약 1,650명을 감당한 것이다. 이를 다른말로 표현하면 1,650부장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무리들은 배고팠을 것이고, 이 사도들이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음식을 갖고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다. 역으로, 사도들은 쉴 틈 없이 음식을 날랐을 것이다. 이 당시의 '배달의 민족' 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더 나아가 남은 음식물 찌꺼기 까지 수거해야했다. 1,650명이 동시에 먹기 시작하고 동시에 식사를 끝낸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마지막 때와 같은 난리와 난리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사도 혼자서 1,650부장 역할을 직접 수행한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에 가깝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50명의 그룹 중 리더, 즉, 오십부장을 세우고, 2~3개의 그룹을 하나의 더 큰 그룹으로 묶어서 또 리더, 즉, 백부장 또는 백오십부장을 세워 질서를 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유대인에게 성경에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등 다양한 직급체계가 등장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직급체계를 갖춘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12명의 사도 입장에서는 자신이 담당한 무리들을 질서있게 통제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어떻게 완수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대해서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 직전까지 예수님께서 12사도를 포함한 무리들에게 선포하신 내용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 이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누가복음 9 : 11]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이론으로 먼저 무리들에게 알려주시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이를 실습하게 하신 것이다. 만약에 12사도들이 이 실습에 대해서 레포트를 작성했다면 어땠을까? 역으로 교회 청년부에서 자신이 한 명의 사도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1,650명에게 떡과 물고기를 질서있게 공급하면서, 이들이 먹다 남은 음식물들을 수거할 방법을 고민해서 레포트를 만들고, 이를 성경에 나오는 직급체계와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사도들에게는 1,650부장의 사명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 됐을 것이다.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과 그 무리들은 단순 갑을관계가 아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구성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리더들의 사명은 그 그룹의 인원들에게 영과 육의 양식을 공급하고, 행여나 부족하거나 버려지는 양식은 없는지를 살피는 등 이들을 보살피는 것(Care)이다. 단순 갑을 관계였다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우리는 갑을 관계를 넘어선 갑(을병)정 관계여야 한다. 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아주신 은혜를 잊지말자.
마지막으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과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이는 오병이어의 배경이 되는 시간을 주목해야 한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누가복음 9 : 12]
오병이어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날이 저물어 가매' 이다. 마지막 때의 시대적 상황은 결국 점점 더 빛이 사라지고 어두워 질 것이다. 즉, 오병이어의 시작점과 유사한 상황이다. 마지막 때 교회는 핍박 받을 것이며, 점점 더 믿음을 지키기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도 코로나로 인해 교회들만 욕먹고 있고, 교회만 집중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다같이 모여서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어려우니 각자 흩어지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마치, 사도들이 무리들을 돌려보내 각자 알아서 저녁먹고 숙소를 구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은 흩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이론 교육과 실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품어야 하는 소망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정부에 대항하여 교회에 모이자!" 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핍박 가운데 핍박하는 자들을 이겨먹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만약에 핍박하는 자들을 이겨먹었어야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을 쓸어버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마지막 때, 즉, 오늘날의 교회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정부를 끌어내리고 관련된 자들을 줄줄이 체포해서 무기징역 받게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한다. 그러기에 20,000 명이 모일 수 없다면 50명씩이라도 모여 하나님 나라를 묵상하고 이를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단, 여기서의 모임은 실제 물리적인 모임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임의 형태가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후자의 좋은 예가 바로 온라인 예배가 될 수도 있고, SNS를 활용하여 한주간 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며 살아온 것들을 바탕으로 서로 은혜를 나누는 등의 새로운 형태의 모임이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이번 묵상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 :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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