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평등을 외치며 '복지' 타령을 한다. 그러면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롤 모델로 삼아 벤치마킹을 열심히 한다. 실제 북유럽의 국가들은 복지를 유지하기위해 엄청난 세금을 걷어들이고 있으며, 이로인해 국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핀란드 총리가 국제회의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의 대표입니다”라 소개받았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다른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지도 않네요."
이것이 복지국가의 총리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믿겨지는가? 그렇게 평등을 외치며 복지를 추구했을 때의 모습은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상향과는 사뭇 다르다.
다만, 이런 자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바로 사도행전 2장 44절~45절 말씀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 : 44~45]
이 말씀을 인용하며 부자들의 돈을 뜯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정책을 펼치려고 한다. 정책만 보면 그럴사해보인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 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사도행전의 말씀은 성령충만한 이들의 삶의 열매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정책은 이 열매의 모습을 강제로 구현하려고 한다. 정부의 권력을 키워 부자들에게는 강력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렇게 걷어들인 세금으로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을 펼치려고 한다.
만약 A라는 사람에게 빵이 3개 있고, B라는 사람이 빵을 1개 갖고 있을 경우, C라는 사람이 A의 빵 하나를 빼앗아 C에게 줘서 A와 B가 빵을 2개씩 갖는 것이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또 다른 빵 하나만 갖고있는 D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어떻게 할 것인가? A, B, D 모두 빵 하나씩만 갖게 하는 것이 공평하고 평등한 것인가? 이 평등을 만드는 C만 배부르게 하는 꼴이 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복지정책의 모형이다. 이 극단적인 예가 공산당 치하에 있는 수용소이다. 모두 공평하게 굶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 이 평등은 수용소와 같이 모두가 동일한 양의 밥을 배급받고, 동일한 옷을 입으며, 동일한 노동을 해야하는 '조건의 평등' 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신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기준' 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평등을 추구해야한다.
즉, 모두의 재산이 같아지는 조건의 평등이 아닌, 모두가 법 앞에서 차별받지 않는 공평한 세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북한과 중국을 보라. 법 앞에 공평이란 없다. 출신성분에 따라 법이 다르게 적용된다. 일반 서민은 평등을 내세우며 삶의 조건을 하향평준화 한다. 대한민국도 이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어 심히 걱정이 된다.
올바른 기독교인이라면 사도행전 2장 44절~45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이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었는지를 고민해야한다. 그 비법이 바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를 간구하며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삶을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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