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까지 2명의 '아나니아'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참고로 사도행전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총 3명 등장한다. 이번 묵상에는 사도행전 9장까지 등장한 2명의 아나니아의 모습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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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성령충만한척 하면서 땅 값을 감추었고, 이로인해 죽임을 당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 아나니아다. 이 사람은 주님께서 환상으로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그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자인지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이의제기를 하듯이 자신의 의견을 어필해본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음 말씀 한마디에 바로 순종하며, 사울의 눈을 뜨게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된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도행전 9 : 15~16]
사울은 초대교회 성도들 입장에서는 원수와도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며 감옥에 잡아넣었으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히틀러와 같은 존재, 북한 수용소에서 고통받고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김정은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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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원수에게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만만한 명령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수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 될 것이고, 그 원수를 눈 앞에 보게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의 복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안수하는 것도 엄청난 절제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이 어려운 것을 하나님의 부연설명 한 마디에 이겨내고 순종했다. 이로인해 사울이 다시 눈을 뜨게되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2명의 아나니아 중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에 가까울까? 첫 번째 아나니아와 같이 말씀묵상하고 예배도 꼬박꼬박 잘 드리면서 불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두 번째 아나니아와 같이 순종하기 쉽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이에 순종하며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나가고 있는가? 이를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첫 번째 아나니아의 결과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사울의 삶의 관점에서 아나니아를 바라보면, 예수님 다음으로 사울의 삶의 터닝포인트 역할을 해준 사람이다. 하지만, 아나니아의 삶의 관점에서 사울을 바라보면, 자신도 제자이고, 큰 맘 먹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는데, 사울이 엄청나게 주목받으면서 사역하고 왕성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시기와 질투가 나지 않았을까?
'나도 제자인데... 내가 저 자식 눈을 뜨게 해줬는데...
나보다 저 자식이 더 주목받고, 더 큰 일을 하고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아나니아가 이런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자신보다 더 주목받는 화려한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그러기에 세상은 우리 삶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입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주인공은 누가 되어야 할까? 다시 말해, 우리 삶을 통해 누가 주목을 받아야 할까?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리고 '창조주이시자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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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에서 아나니아의 삶을 보자.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을 뜨게 해서 사울이 엄청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시기와 질투로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만왕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무를 주신것에 감사하고 순종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주인공 삼아야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야하는 일꾼이고, 불순종하면 죽여버리면 그만인 존재로 인식하고 계실까?
창조의 순서를 보자.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셔서 시간의 흐름을 우리가 눈에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셨고, 각종 식물과 동물을 만드신 후에 인간을 만드셨다. 즉,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다 셋팅하신 후에 이 땅의 주인공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다만, 자신이 주인공병에 걸릴까봐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한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단 하나의 계명을 어겼다. 그리고 죄가 이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인간의 죄의 대가를 치뤄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이 되다니...부럽다...' 라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싸이코패스는 없을 것이다. 이 장면의 본질은 구원의 대상이 우리가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기위한 통로의 역할을 해주신 것이다. 마치 사울의 터닝포인트를 완성하기 위한 아나니아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삶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역으로 구원의 주인공으로 여겨주고 계시다. 이 주인공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우리 삶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싶은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라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삶의 한줄평이다. 한글내용을 보면 예수님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영어성경은 명확하게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즉, 예수님이 주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개념으로 자신이 스스로 끝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비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도행전 초반의 사건인 '성령충만' 이다. 성령에 이끌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성령충만하여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자. 그리고 그 순종의 기쁨과 감동을 맛보며 순종의 아이콘으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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