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 이라고 믿는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왠지 없는게 없으실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로마서 9장에 하나님에게 없는 것을 바울이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9 : 14]
하나님께는 '불의' 가 없다. 조금 허탈한가?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여겨진다. 바울이 예로 든 말씀을 살펴보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로마서 9 : 13]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께서 왜 에서는 미워하셨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구절 앞에 이런 설명을 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로마서 9 : 11]
이는 그저 하나님 마음대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에서가 순종적이지 않거나, 못생겨서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에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이다. 이 내용만 보면 하나님께서 '불의' 가 없다고 느껴지는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9 : 17~18]
바로는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무슨 '불의' 의 극치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듯 한 발언인가? 그렇다면 진정 하나님께서는 '불의' 가 없으신 분이 맞으신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 '신' 으로 여기고 있는가?" 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 되시는 나라이다. 즉, 하나님 독재체제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의' 가 없으신 완벽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재체제는 완벽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스스로 신이 되어 독재를 하는 공산주의의 리더들은 진정한 '불의' 가 없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에 '불의' 투성이의 나라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중요한 요지는 "어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이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로마서 9 : 20~21]
그렇다면 '불의' 가 없으시다고 하는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바로, 가롯 유다 등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신 것일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려고 하는 이유라면, 굳이 이런 자들이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런 희생을 만드시는 분이 과연 '불의' 가 없으신 분이 맞는가?
위의 말씀을 보면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질문은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으로 희생된 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시각에 기초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신' 이라는 신권의 개념은 사라지고, 인권의 관점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괜히 잠언 마지막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잠언 12 : 1)" 라고 했겠는가?
그렇다고 인권이 아닌 신권의 관점으로 이해해보려고 해도, 천히 쓸 그릇의 목적으로 창조된 희생양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What if God, choosing to show his wrath
and make his power known,
bore with great patience the objects of his wrath
--prepared for destruction?
What if he did this to make the riches of his glory
known to the objects of his mercy,
whom he prepared in advance for glory--
even us, whom he also called,
not only from the Jews but also from the Gentiles?
[로마서 9 : 22~24]
이 말씀은 영어 성경으로 봐야 의미가 명확하다. 영어 성경을 직역하면 다음의 3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면 어떻게 할래?
2. 만약에 그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도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동일하게 하셨다면 어떻게 할래?
3. 심지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로마서의 대상은 선민사상에 빠진 로마의 성도들임을 고려해서 이 질문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바울이 얘기한 귀히 쓸 그릇은 유대인이고, 바로나 가롯 유다와 같은 천히 쓸 그릇은 이방인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 3가지 질문에 녹여내며 이들의 생각을 깨뜨리고자 한 것이다.
천히 쓸 그릇은 그저 깨뜨려버리면 되는 그릇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한다면 이 그릇은 더 이상 깨뜨려야 하는 천히 쓸 그릇이 아니게 된다. 더 나아가 귀히 쓸 그릇임에도 불구하고 천히 쓸 그릇과 동일하게 대한다면, 더 이상 귀천의 구분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마지막 질문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인식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나 가롯 유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시고, 오히려 귀히 쓸 그릇처럼 동일하게 대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로 작정을 했으니, 그 목적에 맞게 사용이 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오래 참으신다. 하지만, 이 인내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죄악속에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귀히 쓸 그릇으로 여겨주심에 감사하며 진정으로 영원한 영생의 길을 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바울은 이 관점으로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깨뜨리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마음은 명확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 : 4]
생각해보라. 왜 굳이 하나님께서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셔야 할까?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과 멀어지려고 한다.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어떠한지 끊임없이 죄인들을 향해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나 가롯 유다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만든 그릇을 깨뜨리는 토기장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릇 앞에서 오래참음으로 관용을 베푸시는 토기장이이시다. 그러기에 천히 쓸 그릇을 귀히 쓸 그릇으로 여길 수 있는 방법까지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그 어떤 그릇 보다도 천한 그릇 시절에 말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불의' 가 없으신 하나님의 참 사랑이다.
세상은 인권, 동물권 타령으로 목소리를 낸다면, 우리는 신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겠는가? 천히 쓸 그릇을 향한 토기장이의 오래참음이 끝나가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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