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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창세기

13년간의 침묵

Gospel Barista 2022. 5. 3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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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은 아브람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다는 말씀으로 마무리 된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6 : 16]


그리고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사건으로 시작된다. 갑자기 시간이 13년이 흐른 것이다.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는 그 어떤 내용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브람이 86세에서 99세 사이 13년 동안 성경에 언급될 만한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13년간 하나님과 아브람 간에 그 어떤 사건도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침묵하신 것이다. 이는 이전까지의 아브람의 삶에 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이끄셨던 내용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13년간 침묵하셨을까?

13년간의 침묵


그 이유는 바로 ‘이스마엘의 탄생’ 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언약을 해주셨다. 오죽하면 횃불 언약을 통해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선포하셨을까? 이 언약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던 사건이 바로 ‘이스마엘의 탄생’ 인 것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자손을 이어가게 하도록 제안을 했고, 아브람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브람이 이런 사래의 제안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내의 여종을 통해 남편의 자손을 이어가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보거나, 이스마엘의 임신을 알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내용도 없다. 무슨 일만 있어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아브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너무 이례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해주신 언약을 하나님이 직접 이끌어 가시려고 하셨다. 횃불 언약의 사건만 보아도 동물을 갈라놓은 사이를 횃불만 지나갔고,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 아니, 지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 문화의 흐름을 힘입어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마엘의 탄생’ 사건의 본질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가?


이 사건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13년간의 침묵이다. ‘13’ 이라는 숫자는 성경적으로 거룩하거나 완전수도 아니다. 오히려 악한 세력이 좋아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13일의 금요일’ 이라는 표현을 들어봤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사건의 열매로 13년간 침묵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When Abram was ninety-nine years old,
the LORD appeared to him and sail,
“I an God Almighty ;
walk before me faithfully and be blameless.
[창세기 17 : 1]


13년간 아브람에게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시는 첫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자신의 자손을 이어가는 유일한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브람에게 던지신 첫 마디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다. 즉, 99세인 아브람에게도 큰 민족을 이룰 자손을 주시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각인시키시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앞세워 삶을 살아가려는 아브람의 앞에 "전능하신 하나님" 이 등장하신 것이다. 아브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식겁했겠는가?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말씀이 바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다. 이 말씀은 영어로 보면 조금 더 직관적으로 묵상할 수 있다. "행하여 완전하라" 라는 구절은 영어도 "walk before me faithfully and be blameless" 이다. 이를 직역하면 "내(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충만하게 걷고, 흠이 없어야 한다" 이다. 믿음으로 충만하게 흠이 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요약해보면 ‘믿음’ 과 ‘흠 없이 행하는 것’ 의 2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 만 있어도 안 되고, ‘흠 없이 행하는 행동’ 만 있어도 안 된다. 괜히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 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 이라는 ‘믿음’ 이 없었고, ‘아내’ 외에 다른 여종과 동침하는 ‘흠으로 가득한 행함’을 저질렀다. ‘완전하지 못했던 아브람’ 에게 "완전하라" 라고 선포하시면서 아브람을 다시 하나님의 손으로 다시 붙드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믿음으로 충만하게 하나님 앞에서 걷고 있을까? 그리고 흠이 없을까? 이를 점검해야 한다.


완전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다시 붙드신 후에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이미 아브람에게 하셨던 언약의 말씀을 반복하고 계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세기 17 : 2]


하나님께서는 왜 뜬금없이 이미 약속해주셨던 언약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 힌트는 바로 요한계시록 7교회 중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교회에게 선포하셨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 : 4~5]


에베소교회는 하나님께 칭찬도 받았지만, 책망도 받았다. 그 책망의 내용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다. 이런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처방전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다. 즉, ‘행위’를 통해 ‘처음 사랑’을 회복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 ‘흠이 없는 행위’를 통해 ‘사랑’을 느끼고 계신 것이다. 이런 행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회개’를 해야 한다. 이 당연한 ‘회개’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요한계시록 말씀에 명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이다. 자신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이 어느 시점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다시 ‘믿음’을 기반으로 한 ‘흠이 없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떨어졌던 그 지점을 알게 하시고자 굳이 아브람에게 이미 과거에 선포하셨던 언약의 내용을 다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너가 나의 언약을 너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지? 거기서부터 잘못된거야. 그러니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자. 알겠지?"

라고 아브람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창세기 17 : 3]


아브람은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 아브람의 처음 사랑의 회복의 행위이기도 하다. 무슨 일만 겪으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아브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말씀으로 한방에 회복시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힘이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처음 사랑, 즉, 믿음을 기반으로 한 흠이 없는 행위를 버렸는지 점검하자. 만약에 그런 부분이 있다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찾아내고, 다시 그 지점부터 시작하자. 그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서 설마 아브람에게만 알려주실 것 같은가? 쪼잔한 하나님 만들지 말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점검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그의 아내의 이름 사래를 아라로 바꾸시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선포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향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 : 17~18]


창세기 17장 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바로 엎드렸던 아브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자 이를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 뜬금없지 않는가?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야기되었을까?

이것이 바로 13년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의 열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가 갑자기 자신의 죄가 조명되면, 양심이 있다면 엎드려 회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조롱거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실질적으로 죄로부터 돌이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회개이다. 실질적인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13년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보니,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아내려는 동기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세상적인 지식과 자신의 지식으로 평가하며, 100세의 남자와 90세의 여자가 어떻게 출산을 하냐며 조롱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 몇 마디에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때에 우리가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람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될 것이다. 예수님이 곧 오실 마지막 때에 13년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고 생각해보라. 아찔하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저 조롱거리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이 반 성경적인 제도와 법이 제정되는 것이다. 1000만 기독교인이 있는 대한민국에 차별금지법이 곧 제정될 듯하다. 한 국가의 법을 통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규제할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곧,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할 날이 도래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은 대한민국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단 한순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안 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건히 믿어야 한다. 세상의 조롱을 뒤집어 심판하시고, 이런 조롱 가운데 하나님을 굳건하게 붙든 교회들을 휴거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에 태워 심판을 면케 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를 굳건히 믿고 하루하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며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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