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장은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항목들을 지적하고 있다. 정욕으로 인한 싸움, 간음한 여인에 빗대어 설명한 영적 간음, 형제들 간의 비방거리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 내용들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욕 때문에 싸움질이나 하다니... 시대를 불문하고 영적 간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구만... 내 주변에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생각나네... 역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야... 기본적인 것들부터 행하라고 권고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을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야고보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과 함께 이 말씀을 보면 단순하게 위와 같이 만 생각할 수는 없다.
야고보서는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때 쓰여진 말씀이다. 로마 대화제로 시작된 핍박이었으므로 로마 지역 인근에서의 핍박이 가장 심했다. 동물의 가죽을 입혀놓고 굶주린 사나운 개를 풀어 물려 죽게 하고, 기름에 담가놓은 옷을 입혀 나무에 매달고 불을 붙여 횃불처럼 태우기도 했다. 당연히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황제가 주도한 핍박이므로 꼭 로마 인근의 지역이 아니더라도 로마 제국에서의 기독교인을 향한 인식이 예전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쓰여진 것이 야고보서이다. 매일같이 눈앞에서 순교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임을 인식하고 다시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을 살펴보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4 : 1]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순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들을 비방하는 기독교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이라는 칼날의 끝이 자신의 목에 살짝 닿아있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속 깊은 곳 고이고이 잘 숨겨놓았던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법이다. 즉, 여기서의 정욕(Desire)은 단순한 일반적인 욕망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욕망의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핍박의 시대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끝까지 살고자 하는 이들 간의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 당시 서울을 끝까지 지키며 북한군과 싸우겠다는 기독교인들과, 김일성을 일단 환영하며 교회를 지키자는 사람들로 나뉘어 다툼이 일어났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 : 4]
이런 시대적인 상황가운데 자신이 살고자 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간음한 여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잔인하게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고통을 상상하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지금 이 시대에 WCC 동참 여부를 따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했고 각 교회 성도들의 명단을 확보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명단을 갖고 군인 10명이 총을 들이밀며 각자의 집의 대문을 부수고 우리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잇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1초의 침묵, 즉, 1초라도 망설임이 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을 지킬지를 순간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바로 북한군이 체포하지 않겠는가? 그저 0.1초의 망설임 없이 "김정은 만세!"를 외치며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상황 가운데 영적 간음을 하지 않을 믿음의 소유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북한군이 휩쓸고 간 거리에서 교회 사람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모두 예수를 욕하고 우상을 향해 만세를 외친 자들이지 않겠는가?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야고보서 4 : 11]
이런 자들끼리 남아있다면, 서로를 향해 배도자라고 비방하고 낙인을 찍을 수 있다. 자신은 만세를 1번 외쳤는데, 어떤 전도사가 3번 외쳤다는 소문이 돌면 양심 없는 전도사라는 낙인을 찍지 않겠는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끼리 서로 누가 더 깨끗한지를 겨루고 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쓰여진 당시의 상황이자, 대한민국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통해 2번이나 겪었던 기독교인 핍박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 가운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사실 이에 대한 정답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답대로 행할 수 있을까?'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를 위해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야고보서 4 : 12]
우리는 민주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3권 분립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맞추어 국가를 운영하도록 되어있다.
이 3권 분립이 무너지면 국가가 부패하게 되고, 독재가 가능해진다. 자신이 원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대로 재판하며 자신의 반대편에 서는 자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둬두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생뚱맞게 입법자와 재판관이 오직 한 분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통념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굉장히 위험한 사회구조이다.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개념이 있다. '하나님은 신이시다.'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운영하는 나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3권 분립을 통해 서로가 견제를 해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신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왕정체제가 가장 완전한 통치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입법부의 역할로 우리에게 이 땅에서 지켜야 하는 법을 세우셨고, 그 법대로 행했는지를 판단하는 사법부의 역할로서 재판을 하실 것이다. 이 개념을 우리는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게 하는 믿음의 비법인 것이다.
'나는 돌대가리라 이 개념이 어려워서 이해 못 하겠는데?'라고 나약한 소리 하지 말자. 돌에 새겨진 것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돌대가리를 주심에 감사하며 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자.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입법부와 사법부를 모두 주관하시는 분께서 이 땅에 친히 내려오셔서 단 하나의 기관을 만드셨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이 땅에 잘 정착하고, 사람들이 그 법을 잘 지키며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님 나라의 행정부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가장 완벽한 하나님 나라의 법이니, 하나님 나라의 입법부와 사법부를 견제할 생각은 하지 마라. 왕국의 행정부는 그저 왕의 명령에 순종만 하면 된다. 하나님 나라의 행정부의 일원으로서 교육부 장관, 재경부 장관, 문화부 장관 등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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