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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성경 인물전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레미야] 하나님이 뭐라셔? 그대로 할게! - 2

Gospel Barista 2021. 6. 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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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예언대로 역사가 흘러갔는지 살펴보자.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레미야 43 : 1~7]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거 거짓말이여! 하나님이 그곳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라며 자신들의 생각을 앞세우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취급했다. 분명히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외치던 자들이다.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하나님" 께 기도해서 그 뜻을 알려달라고 한다.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예레미야 42 : 2]


나의 하나님, 또는 우리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 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만 하나님이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를 조금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예레미야가 믿는 신(이들에게는 우상 또는 또 다른 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믿는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예레미야 44 : 17~18]


이들이 믿는 것, 즉, 이들에게 있어서 신은 '하늘의 여왕' 이었던 것이다. 이런 우상을 신으로 믿고 있으니, 참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취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예레미야에게 말했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자신들의 지금 상황이 올바르다는 근거를 찾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믿지 않는 신이더라도 공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니, 그 뜻을 형식적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들의 생각과 상황에 맞는 대답이 올줄로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 반대의 대답을 듣게되자,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거짓' 취급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 당당히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지 묻는 부자청년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 : 16~22]


이 청년은 마치 영생을 위해서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모든 것을 다 할 것 처럼 얘기하더니,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결국 순종하지도 않을거면서 순종할 것 처럼 자신을 신실한척 꾸며낸 것이다.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서 맘몬을 버릴 수 없는 자가 마치 영생을 위해서 다 할 수 있을것 처럼 자신을 꾸며낸 것이다. 막상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맘몬을 버려야하는 상황이 오다보니, 이를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이 부자청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삶의 우상단지를 끝까지 붙잡은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가 '순종' 의 첫 걸음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라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 의 첫 걸음이다.

그렇다면 순종하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순종의 아이콘 노아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사람들을 한탄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 : 5~7]


이 바로 다음 말씀에 노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창세기 6 : 8]


노아라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죄악으로 나아갈 때에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말씀을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이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을 수 있는 아기에게 옷 입혀주듯이 은혜라는 것을 입혀준게 아니다. 영어 말씀을 보라. 노아가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아낸 것이다(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이것이 은혜를 입은자의 모습이다. 즉, 노아는 죄악으로 가득찬 상황 가운데 여호와의 눈동자를 흔들림없이 쳐다보고 하나님과의 아이컨택을 놓치지 않고 하루하루 그 은혜를 찾아내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삶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 : 9]


이런 삶이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인 것이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고, 이에 대한 노아의 반응은 이렇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 : 22]


그에게는 그저 '준행' 만 있었다. "하나님! 무엇이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께요!" 라는 거창한 각오를 앞세우며, 자신의 이 감정과 각오를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시기를 기다리는 자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또 다를 예를 살펴보자. 유명한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충성된 종에게 칭찬하는 장면을 보면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맡기리니" 라고 되어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태복음 25 : 21]


하나님께서는 적은 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시고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엄청 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며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질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씀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이 큰 일에 순종하기까지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적은 일에 순종을 했을지를 말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 16 : 10]


성경에 명확하게 선포되어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처음부터 방주라는 큰 것에 충성한 것 아닌가?

아니다. 노아는 그 악한 세대 가운데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아내는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작은 것에 충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이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에 잘 녹아들어가있다. 10명의 종들이 다같이 한 므나씩 받았다. 이 상황에서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열 고을을,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므나를 받았다.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은 명확하다. 므나 비유는 똑같이 분배되었고, 달란트 비유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게 배분되었다. 다만, 이에 대한 보상이 다르다. 므나 비유는 보상이 남긴 대로 차이가 있었고, 달란트 비유는 보상이 같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똑같이 분배되어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루 24시간, 한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 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난 것, 학교라는 의무교육과정을 거치는 것 등등이다. 이 한 므나를 받고 열심히 해서 많은 므나를 남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많이 남긴 만큼 보상을 해주실 것이다. 즉, 하루 24시간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한 가정의 구성원이자 한 국가의 국민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며 살아내는 것, 지겹고 어려운 교육과정이지만, 그 가운데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공부하는 것,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차별화된 보상을 주실 것이다. 이것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적은 일들이다.

이 한 므나의 적은 일은 신경도 안쓰고 무시하면서 왜 자신에게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달란트를 안주시냐고 불평불만을 하며, 달란트만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하는 이들은 한 므나를 수건에 감싸둔 자와 똑같고, 한 달란트 받은 자와 똑같다.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내어 쫓김을 당하고 밖에서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누가복음 19 : 24]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태복음 25 : 28]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 : 30]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자.

"나의 감정과 각오를 앞세우며 하나님께 무엇이든 순종할테니 말씀만 하시라고 기다리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여호와의 눈동자에서 은혜를 찾아내는 자인가?". 우리 모두 후자의 모습으로 하루하루 살아내며 이 시대에 순종의 아이콘으로 살아가자.

목자에게 순종하는 양떼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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