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마태복음 7 : 1~2]
이 말씀이 지목하는 내용이 비판인지, 비난인지, 판단인지, 정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의 비판이라는 원어는 '크리노' 라는 단어인데, 의미가 다음과 같이 왠만한 뜻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별하다, 결정하다, 시도하다, 언도하다,
벌하다, 복수하다, 결맞짓다, 정죄하다,
비난하다, 판결하다, 간주하다, 판단하다,
고소하다, 정하다, 심문하다, 선고하다, 심의하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비판하는 이들을 향한 말씀으로 굉장히 많이 활용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비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비판하는 이를 향한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을까?
마태복음 6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이미 오늘 하루라는 시간안에 꽉 차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현실의 문제들을 바라본다면, 잘못된 것들 투성이일 것이다. 즉, 지적할 사항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갈 수 있을까? 무조건 잘못만 지적하면 해결이 될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은 가정문이 아니다. 만약 가정문이었다면, 영어 성경은 이렇게 됐을 것이다.
"If you don't want to be judged, do not judge."
"만약 비판받기 싫거든, 비판하지 말라"
하지만, 산상수훈의 말씀은 "Do not judge " 로 시작하는 명령문이다. 그 이후에 "or you too will be judge." 로 이어진다. 즉, "비판하지 말아라. 만약,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너 또한 비판받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 명령을 어기고 내가 어떤 사람을 비판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내가 비판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비판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살고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즉, 동일한 비판의 기준으로 나 또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며, 결국 나 또한 비판을 받게 된다. 내가 비판을 받는 다는 것은 누군가가 비판을 한다는 의미이고, 그 비판한 이 또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비판하는 이들만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시해주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How can you say to your brother,
'Let me take the speck out of your eye,'
when all the time
there is a plank in your own eye?
[마태복음 7 : 3~4]
"너희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형제의 눈에서 티를 뺄수 있겠느냐?"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들보는 통나무 급의 큰 것이며, 주로 집을 지을 때 주축이 되는 나무이다. 티는 말 그대로 나뭇가지나 짚 정도의 작은 먼지와 같은 것들이다. 즉, 내 눈에있는 들보늘 먼저 빼지 않으면서, 남의 작은 티를 지적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내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거울이 없는 이상 내 스스로 내 눈을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에 거울은 아무나 갖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내 눈에 들보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은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느냐?' 라고 하지 않고,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한다. 영어성경에도 'pay no attention' 즉, 주목하지 않고있다고 되어있다. 내 눈의 들보는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눈에 작은 모래알이 하나만 들어가도 엄청난 통증이 몰려온다. 하물며 들보가 내 눈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통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통증을 못느끼고 오히려 이 상태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죄의 달콤함에 취해 들보, 즉, 죄가 내 눈에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수많은 고문의 방법이 통증의 고통을 활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통증은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통증은 매우 잘 견디다 못해, 이를 달콤하게여기며, 더욱 더 이 달콤한 통증의 자극을 원하고 있다. '거룩' 하신 하나님 형상 닮아 지음받은 우리이다. '죄의 달콤한 통증' 과 '거룩' 은 공존할 수 없다. 죄의 통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으실 만큼의 통증이다. 내가 얼마나 달콤한 통증인 죄를 아프게 느끼는지를 점검하자.
이런 들보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plank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remove the speck from your brother's eye.
[마태복음 7 : 5]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외식하는 자여' 라고 하신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후벼파면서 비판하는 자들은 하나님 기준에서 '외식하는 자' 라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을 통해 남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역으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어필하려고 하는 마음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해야하는 첫번 째 단계는,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한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는 들보를 볼 수 조차 없기 때문에 이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눈꼽을 떼는 수준이 아니라, '치료' 의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 들보를 정확히 보고 빼내어줄 치료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 : 2]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춰주신다고 약속해주셨다. 치료자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자. 여호와를 경외하며 우리 눈의 들보를 빼어내자. 뿌리까지 뽑아내자.
그렇다면, 치료에 초점을 맞춰보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한 사람만 치료해주실까?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whenever I would heal Israel,
the sins of Ephraim are exposed and
the crimes of Samaria revealed.
They practice deceit, thieves break into houses,
bandits rob in the streets;
[호세아 7:1]
영어성경을 보면, 'Whenever I would heal Israel' 이라고 되어있다. 직역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할 때 마다" 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치료 뿐만 아니라, 민족과 그 사회도 치료해주신다. 그것도 한 번만 치료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매번 치료해주시려고 하신다.
이 관점으로 보면,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상황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라, 어느 한 민족과 그 사회도 해당될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론들이 지배하고 있고, 공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악' 을 주입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통증을 느끼지는 못할망정, 서로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지경이다. 이 사회 전체가 죄의 달콤함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가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민족과 이 사회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치료를 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민족의 들보를 빼어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하루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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