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려는 자의 이어지는 모습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십자가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일까?
우선, 십자가는 사형도구이다. 가장 악질의 죄인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사형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는 누가 우리에게 지게 할까? 그 이전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한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하나님의 계획 이었지만, 최종 판결은 본디오 빌라도가 했다. 하지만, 이 판결을 만들어내기 위한 여론을 만든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등,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중심은 자신들을 높이려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뿐만 아니라, 그냥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에 속한 이들도 함께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했다.
우리에게 우리의 십자가를 지게하는 이들 또한 동일하다.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우리 어깨 위로 짓누를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못박혀 죽을 형벌의 도구를 스스로 지고 가는 것이다. 즉, 죽일듯이 달려드는 십자가 형벌 급의 핍박과 고난을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한복음 15 : 18~20]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죽일 정도로 미워했다. 이 시선은 예수님을 쫓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이 우리를 박해하고 핍박을 가하고 괴롭히고 고난을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고난을 준다고 울그락 불그락 거리면서 객기부리고 난동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하는 우리의 십자가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구러네사람 시몬을 붙여주신 것 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외로운 싸움을 하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구레네사람 시몬과 같은 이들을 붙여주실 것이며, 가장 든든한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실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길을 먼저 가신 롤 모델이 명확하게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가 바라봐야하는 대상은 바로 '믿음의 주요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히브리서 12 : 2]
단순히 지긋이 바라보는 수준으로는 이 십자가는 감당할 수 없다. 영어성경에 나와있는 것 처럼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FIX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 단계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 이다. 각자의 십자가만 지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자동적으로 딸려오는 고난이다. 이 고난을 버텨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야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버티고 서있는 것과,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은 천지 차이 이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서 전진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봐야하는 그 대상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이시다. 우리가 십자가에 집중하게되면, 우리의 아픔과 괴로움만 보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십자가 이후에 있을 기쁨을 위하여 이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다보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미 이 산상수훈 제일 처음에 약속해주신 천국약속을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자. 견디다 너무 힘들면,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자.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 이런 자를 외면하실 분이 아니시다.
이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이것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의 협착(narrow) 의 수준이다. 절대로 만만한 문과 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정도 협착한 문과 길이라면,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까 말까한 문 일 것이다. 즉,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예수님을 따라서 동행하는 길은 나와 예수님 1:1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 라는 공동체에 속해있지만,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1:1 관계임을 잊지 말자.
이는 WCC, WEA 를 옹호하거나, 종북사상 등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에 빠져있는 우상숭배하는 교회에서도 나 혼자 믿음생활 잘하면 된다는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0 : 21]
그렇다고, 올바른 교회에서 믿음생활 한다고 해서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다시 오실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순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거룩하게 기다리는 것은 각자가 1:1 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이 부족한 이들에게 기름을 나눠줄 수 없는 것이다. 각자가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밝힐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이는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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